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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밑줄]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_윤이형

+808

그들은 훗날 가끔 생각했다. 그렇게 고단하고 힘겨운 상황에서 악역까지 맡는 일을, 그들은 각자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더 나쁜 사람, 가해자가 되는 일을, 희은도 정민도.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두 사람 안에 원래 내재해 있던 영혼의 좋은 부분, 선의와 호의, 배려심 들과 악당이 되기 싫다는 욕망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한 일이었다.

 

+809

그는 점점 벌어져가는 희은과의 사회적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희은을 배려하는 것으로 그 부분을 메우고자 했다. 그는 마지막 한 방울의 시간까지 희은에게 내주었다.

 

+810

희은은 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경험한 답이 만족스럽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에 굳이 직접 정답이 되어 가능성을 증명해보려고 했던 자신과는 달리, 똑같은 이유에서 결코 답을 만들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그들이 인상 깊었고, 자신은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었는지 궁금해졌다. 다른 답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환경이 변하지 않는 한, 문제 자체가, 지문 자체가, 보기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희은은 자신이 낡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이 소속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빨리 변하는 이 시대에 속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811

자신이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과 표정보다는 대의에 더 크게 이끌리고 영향을 받으며, 그래서 종종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사람임을 이제 희은은 인정했다... 우선 살아남는 일,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가급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애쓰는 일. 선택을 하고 그 결과가 그렇게 나쁘지 않기만을 바라는 일,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일.

 

대니_윤이형

+812

멀리서는 봐도 가까이 다가가진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건 아마도 무심히 상처 입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자의 질투였을 것이다.

 

윤이형_수상소감

+813

살아 있는 것만으로 좋다고 말할 수는 도저히 없는 날들이지만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가끔은 기뻐하며 살아요.

거창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늘 하던 일들을 하면서요.

저도 그래볼게요.

 

울어본다_장은진

+814

어떤 단어를 아는 것조차 형편을 따르게 되는구나,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맞는 말이었다. 경험이 있고, 경험을 한다는 건 그 경험이 가리키는 단어를 익히는 과정이었다.

 

+815

소복하게 눈이 쌓인 바닥에는 발자국이 하나도 찍혀 있지 않다. 밤에는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증표이자 잠을 자야 한다는 약속이고 합의다. 여자는 세상의 합심에 잠시 시무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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