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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6
이 책은 당신과 '쓰는 기분'을 나눠 갖고 싶어서 썼다. 손끝에서 생각이 자유로워질 때의 기분을 나누고 싶었다. 성급하고 불완전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내 속에서 걸어 나와 흰 종이에 도착하는 과정을 돌보는 일, 손가락이 그를 쫓는 일, 쫓다 멈추는 일, 멈추고 바라보는 일, 바보 같은 일이라고 그를 탓하는 일, 서로 엉키면서 작아졌다 커졌다 반복하는 일, 그러다 드디어 나와 종이 위의 그가 합일을 이루는 일! 이때의 기분을 당신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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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쥔 사람은 자기 삶의 지휘자가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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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나?"
"네?"
"전봇대처럼 서있잖아."
마리오는 고개를 돌려 시인의 눈을 찾아 올려다보았다.
"창처럼 꽂혀있다고요?"
"아니, 체스의 탑처럼 고즈넉 해."
"도자기 고양이보다 더 고요해요?"
네루다는 문손잡이를 놓고 턱을 어루만졌다.
"마리오, 내게는 '일상송가'보다 훨씬 더 괜찮은 책들이 있네. 그리고 온갖 메타포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건 부당한 일이야."
"뭐라고요?"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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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자는 자기 환상에 빠진 자들이지요.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표현을 찾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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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아는 내 따뜻한 갈색 엄마" - 앤 섹스턴 <밤엔 더 용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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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빌은 카몽이스가 촛불이 꺼지자 자기 고양이의 눈빛에 기대어 시 쓰기를 계속한다고 적고 있다. 자기 고양이의 눈빛에 기대다니! 그런 부드럽고 섬세한 빛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곧 모든 시시한 빛 '저 너머'에 있는 빛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
+2772
그리움이란 그와 나 사이의 '거리'에서 비롯되는 감정입니다. 여기 없는 사람, 당장은 볼 수 없는 사람, 그와 나 사이에 자리한 조빌 수 없는 거리에서 발현되는 감정이지요.
+2773
젊은 여인이 늙은 여인이 될 때까지, 그녀는 편지를 씁니다.
+2774
"나는 사람한테만 시인이고 싶지 않아. 나무나 풀, 바위, 먼지 앞에서도 시인이고 싶어."
+2775
제 생각에 예술 분야의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가르침은 이런 일 같아요. 배우는 자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일, 에너지를 점점 더 채울 수 있게 몰고 가는 일, 창작할 때 자유롭고 힘이 세지도록 돕는 일이요.
+2776
내가 좋아하는 것 속엔 시가 들어있다. 좋아하는 사람의 눈동자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멜론, 호박, 두부, 우유, 시금치, 뮤즐리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책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바람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나무엔 시가 있다. 어젯밤 전화해서 울던, 좋아하는 친구의 눈물엔 시가 있다. 책상 위 좋아하는 모래시계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커피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음악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무용수의 몸짓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도서관 창문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가을밤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죽은) 아버지의 굽은 등엔 시가 있다. 좋아하는, 좋아하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 그 속엔 하나도 빠짐없이 시가 들어있다.
+2777
당신이 지닌 목록은 무엇인가요? 무엇이든 좋으니 작성해 보세요. 목록을 들여다보세요. 계속, 들여다보세요. 뭐가 보이나요? 그 길목에 머무르세요. 한사코.
+2778
만약 당신이 시를 쓰고 싶다면, 고기는 고기가 아니고 의자는 의자가 아니며 물은 물이 아니어야 합니다.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대상을 보이는 대로 보지 말고, 그 너머에 닿으려 해 보시기 바랍니다.
+2779
중요한 건 소재가 아니라, 당신이 고른 소재에서 자기만의 경험을 꺼내는 일입니다.
+2780
연필은 랩톱으로 작업하는 내 옆에서 잠자코 있다. '내가 할 일은 없나?'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마음속으로 말한다. '새를 쓸 때, 일기를 쓸 때, 시작이 어려울 때는 네가 필요해. 그러니 기다리렴.' 연필은 의젓하게 책상에 엎드려있다. 푸른 개 같다.
+2781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 존 버거, <벤투의 스케치북> 중
+2782
솔직함은 재능의 일부다.
+2783
움직이는 장면의 합으로 이루어진 영상을 오래 보면 책을 읽기 어렵다. 책은 움직이지 않는 장면(무대)에서 느리게 걸어다니는 언어를 좇아, 독자가 움직여야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2784
"가슴이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어? 그렇다면 첫사랑이네. 축하해! 그리고 조의를 표할게."
축하와 조의를 동시에 표하는 마음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랑과 욕망의 세계로 온 것을 환연" 한다고 말하는 할머니 최고.
+2785
때때로 내가 종이 위에서 서성인다면, 백지를 피해 도망 다니려 한다면, 엄청나게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욕심 탓일 게다. 얼토당토않지! 엄청나게 좋은 글이라니? 바보 같긴.
+2786
어느 날. 나는 구원을 받았다 볼테르의 이 문장을 읽은 거다. "최선은 선의 적이다 The best is enemy of the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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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건 없다. 시간은 무엇이든 먹어치운다. 야금야금 티 나지 않게, 혹은 게걸스럽게, 때론 단번에 먹어치운다. 시간은 아기를 자라게 하고, 청년을 늙게 한다. 사랑을 사라지게 하고, 나무를 썩게 하며, 별을 소멸하게 한다. 가구를 낡게 하고, 동물을 죽게 한다. 시간은 무엇도 '그냥 그대로' 두지 않는다. 시간은 방관자이자 폭군이다. 예외를 두지 않으며 자비를 모른다.
+2788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또한 "모든 메뉴는 일종의 부고"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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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 나이에 녹아버린 초처럼 흘러내리다 죽은, 내 할아버지의 마지막 며칠에 대해서 나는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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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하는 사람은 노래를 듣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누군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냥' 보고 넘기게 되지 않지요. 저절로 머리가 움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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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단순히) 달이라고 부르지 않는것. 슬픔을 (단순히) 슬픔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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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작품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퇴고를 얼마나 오래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품이 주인의 손을 떠나 테이블 위로 공개된 이후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2793
하루는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쓴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물어보았다. 나는 대답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사람처럼 금방 대답했다. "읽을 땐 내리는 비를 보고 있는 것 같고요. 쓸 땐 내리는 비를 다 맞고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