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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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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스토리 #21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보건소에서 난생처음 남의 손에 콧구멍을 힘차게 찔리고, 그 이질감에 눈물을 찔끔 흘리곤,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이었다. 콧구멍과 목구멍 그 어디쯤 한 번도 손 닿지 않았던 순수한 내부의 속살이 자극받아서 일까? 어느덧 내 발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옻칠공방, 2평 남짓한 동네 미용실, 증기다리미가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세탁소를 지나자 소담한 성당이 나왔다. 성당의 담은 성인 남자의 가슴 높이였고,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성당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때마침 유아반의 아이들이 수녀님을 따라 어디론지 나들이 갈 모양인지 재잘거리며 줄을 서고 있었다. 성당 외벽 앞엔 커다란 성모 마리아의 조각이 두 팔을 내밀고 있었고, 아이들을 향해 두 팔을 내..
Thank for the music #20 한쪽 이어폰을 꽂은 채로 아들이 말한다. 이어폰이 고장 나서 한쪽만 들린다고. 이어폰이 귀걸이 마냥 늘 귀에 붙어 있는 녀석인지라, 사준지 1년도 안된 이어폰의 고장이 왠지 이해가 된다. 바쁘신 고2 아들을 대신해 서비스센터에 갔다. 재빨리 미리 검색해 보니 한쪽 이어폰이 고장이면 리퍼 제품으로 교환할 거라고. 근데 그게 가격이 상당하다. 불길한 예감에 서비스 센터 옆 매장에서 신품 이어폰의 가격을 살펴보았다. 고장 이어폰의 검사가 끝났고, 직원은 상냥하지만 피곤한 목소리로 말한다. 두 쪽 다 고장이라 비록 한쪽이 지금 들려도 곧 안될 거라고. 두 쪽 다 리퍼 제품으로 교환하는 비용과 신품을 사는 비용이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 작은 망설임을 떨쳐내고 난 신품을 사주기로 결심한다. 선임 중 한 ..
의기양양한 패배 #19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한다. 좌우대칭의 반듯한 인물구도와 아름다운 색감, 회화처럼 하나하나 계산된 미장센과 인물들의 무심한 대사처리… 연극과 만화 그 사이 어디쯤 자리 잡은 느낌이 늘 내 시각과 마음을 간지럽혔다. 근데 그의 영화를 더 좋아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의 뒷이야기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이 영화는 한 소녀가 어느 공원으로 책을 들고 찾아가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 공원의 중앙에는 한 근엄한 남자의 흉상이 보인다. 흉상에 적힌 글은 ‘국가의 보물과 같은 작가’. 그리고 소녀의 책 제목이 보인다. 이다. 영화에서는 그냥 ‘작가’라고 언급됐던 그 남자의 이름을 나는 의 메이킹북을 통해 짐작하게 되었다. 영화 속에는 액자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로 나오지만..
The Art of Getting by #18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때론 모든 의욕을 사라지게 한다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 속에서 우린 어차피 죽을 삶의 의미란 건 도대체 무엇인가 질문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아주 오래된 인간의 근원적 질문이다 누군가는 그 질문의 답을 종교에서 찾고 영원불멸의 삶을 우린 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거대한 혼돈이라고 생각하며 염세주의적인 철학을 설파하기도 한다 바로 그 지점의 출발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진지하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인간은 그 답을 알 수 없게 된다 성장기의 인간이라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직 말도 생각도 근육의 힘도 미성숙한 인간이라면 - 가령 9살이라던지 4살이라던지 하는 나이 – 삶의 의미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 육체를 컨트롤할 수 ..
뜨끈한 국밥의 기억 #17 뜨끈한 국밥의 기억_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밖에 없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허름한 돼지국밥집의 기억이 지금도 국밥을 사랑하게 된 이유의 전부다 비릿한 냄새의 어느 추운 날 왜 거기로 이끌려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리둥절한 채로 다 큰 사내들 투성이인 그곳에서 어린 난 주인이 던져주듯 함석테이블에 놓은 된장이 풀어헤쳐진 돼지국밥을 한숟갈 입에 물었다 따뜻했고 구수했고 알지못할 서글픔도 모두 삼키는 맛이었다 아마도 그날도 아버지는 불콰한 얼굴로 소주잔을 들이켰으리라 그의 상실과 그의 좌절을 난 알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는 늘 현학적이었고 나약했고 술에 취해 비칠거릴 때만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러 놓을 뿐이었다 가족의 밥벌이를 책임지는 남자의 몫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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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의 흔적
언뜻 본 아름다움 #11언뜻 본 아름다움 여행지에서 마주친 소녀의 미소를 기억한다 취리히 호수의 청둥오리들의 부유를 기억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비루한 일상이 되어 고색창연해지지만 스쳐 지나간 모든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우리는 지금 소유하지 않은 것들을 희망하며 가장 거창한 찬사를 바치고 마는 것이다 성당에서 들려왔던 이름 모를 미사곡의 선율 놀이터의 구름다리에 거꾸로 매달려 웃던 소년의 하얀 미소 그러니 다시 말한다, 박제할 수 없는 순간은 기억으로 남아 아름다움이 된다 모든 언뜻 본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질 수 없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된다
함정 #10 함정 큰 얘기를 해야 한다 큰 돈이 드는 매체니까 큰 얘기가 반드시 큰 공감을 산다는 전제가 있다면 모를까 우리는 쓸데없이 무겁다 정작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는 늘 졸면서 들으면서 사소한 공감의 수다는 언제나 반갑지 않은가 이제 광고는 수다 떠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