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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소셜 Ultra Sociality

사피엔스에 새겨진 '초사회성'의 비밀 : 울트라 소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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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에 관심을 기울인다. 창업하려는 사람은 돈이 될 만한 새로운 소셜 미디어 창안에, 기업가는 인기 많은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비즈니스 구상에, 이용자 대부분은 친교와 정보 교류의 장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 소셜 미디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좀처럼 던지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소셜 미디어가 어떤 특성을 가졌기에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까?'를 묻는 이들은 거의 없다. 대체 소셜 미디어는 인간 본성의 어떤 측면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1289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아기가 생존을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무기는 엄마, 아빠를 부르는 '응애'다. 유아독존하려는 아기는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다. 아기에게 생리적 욕구나 안전의 욕구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회적 욕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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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인생사에서 사회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런 사회성의 집합체가 인류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는 더 큰 화두다. 최근 들어 다수의 영장류 학자는 인간의 독특성이 탁월한 지성의 사회적 측면에 있다고 주장한다. 타 개체의 마음을 잘 읽고 대규모의 협력을 이끌어 내며 타 개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웠던 인간의 독특한 사회적 능력이 우리를 지구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즉, 유일하게 호모 사피엔스만이 꽃피운 '문명'은 사회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사회성을 나는 '초사회성 ultra-sociality'이라고 부른다.

 

+1291

신경과학자들은 '거울신경세포 mirror neurons'를 발견했다. 이 세포 때문에 우리는 남이 하는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실제로 그 행동을 '할' 때 내 뇌 속에서 벌어지는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거울신경세포는 일종의 시뮬레이션 세포이고, 인간의 거울신경세포는 원숭이 것보다 더 정교하다.

 

+1292

'마음 읽기'는 인간만이 가진 또 다른 사회적 능력이다. 인간은 타인의 생각과 의도를 읽어 내는 복잡한 추론 과정을 일상생활에서 해나간다. 이것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집단생활을 영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1293

얼굴 표정은 수많은 안면 근육을 움직여 만들어 내는 것이기에 숨기거나 가장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표정은 언어보다 훨씬 더 깊은 심적 신호를 전달한다.

 

+1294

인간의 공막은 사회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흰 공막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상대방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 의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흰 공막이 호모 사피엔스의 상호 협력을 촉진했다는 설명을 '협력적 눈 가설 cooperative eye hypothesis'이라 부른다.

 

+1295

자연계는 '불공정'하다. 이 불공정한 세상에 원숭이와 침팬지가 보이는 반응은 마냥 억울해하거나 그냥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공정성 감각이 훨씬 더 발달한 인간은 도덕적 혐오감과 함께 배려심을 증진시키며 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왔다. 

 

+1296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타인을 속여 넘길 수 있다. 

 

+1297

동물의 '문화'와 인간의 문화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를 규명하려면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구분법은 유용하다. 인간의 문화는 모방과 학습'을 통해 행동이 전파되는 반면, 동물은 '자극 강화'를 통해 행동을 익힌다.

 

+1298

지식은 '저절로' 확산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지식을 잊어버리고 중요한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 인간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지식이 전수되지 않는다면 문명은 붕괴될지도 모른다.

 

+1299

'우리와 남들'을 구분하고, 내집단에 속한 구성원을 더 좋아하는 성향은 진화의 측면에서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집단주의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성향이 진화했다는 것과 그런 성향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1300

친사회적 행위는 좋은 평판을 남긴다. 그 사람이 신뢰할 만하니 친구, 동료, 연인으로 삼기에 바람직하다는 시그널이다. 진심 어린 친사회적 행위는 집단 내의 지위와도 관련이 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는 집단 내에서 그 사람의 지위를 올려 주며 나중에 지도자로 추대될 개연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이른바 '경쟁적 이타성 competitive altruism'은 친사회적 또는 이타적으로 보이려는 노력을 통해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경쟁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희생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이타적 행위로 경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값비싼 신호 이론 costly signaling theory'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값비싼 신호 이론에 따르면, 이타적 행위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할 만큼의 능력과 의향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신호다. 

 

+1301

경쟁적 이타성은 인간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북아메리카 북서해안에 거주하는 인디언에게는 포틀래치 potlatch라는 풍습이 있다. 사냥해서 얻은 음식 등을 손님을 초대해 나누어 주는 의식이다. 이곳에서 개인의 서열과 권위는 성대한 잔치를 얼마나 자주 열었는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일종의 나눔 경쟁을 벌인다. 이런 경쟁은 첨단 테크놀로지에서도 나타난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에서 자신의 시간, 에너지, 지식을 동원해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거나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가용 자원을 써 가며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하니 이것도 경쟁적 이타성의 사례라 할 만하다. 그들은 어쩌면 SNS에서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나눔 경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셜 미디어에서 파급력이 강한 콘텐츠는 실제 세계에서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다. 그런 점에서 콘텐츠를 게시하고 공유하는 것을 번식 성공률을 높이려고 애쓰는 개체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1302

이런 맥락이라면 기부는 '평판 구매 행위'라고 다시 규정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러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얼마나 위대한가! 하지만 신이 보고 있기에 선한 행동을 하라는 가르침은 또 얼마나 인간적인가! 평판에 민감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타자의 시선을 초월하는 인간은 없다.

 

+1303

침팬지가 서식하는 아프리카의 숲에 들어가 보면, 인간이 얼마나 시끄러운 종인지 알 수 있다. 20미터 높이의 아찔한 캐노피에서, 녀석들이 보내는 일상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한두 마리가 팬트 후트 pant hoot, 즉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침팬지 특유의 소리를 교환하며 한바탕 떠들고 나면 숲은 다시 조용해진다. "침팬지가 사색에 잠겨 있는 것 같다."고 하자 30년간 야생 침팬지를 연구해 온 전문가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걔네들은 그냥 멍 때리고 있는 거예요."

 

+1304

영장류를 연구하는 외계인 과학자가 있다면, 호모 사피엔스를 한마디로 '수다쟁이 영장류'라고 규정했을 것이다.

 

+1305

인간이 시끄러운 것은 단순히 말을 많이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구별되는 또 한 가지는 말과 문자로 이야기를 만들고 전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스토리텔링 storytelling은 인간에게 고유한 특성 중 하나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은 문명은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만들고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에너지가 소모되고, 인지 능력이 필요하며, 시간도 많이 걸린다. 이야기가 어떻게 쓰이는지도 분명치 않은 것 같다. 

 

+1306

적응주의 문학론은 이야기의 적응 기능을 강조한다. 이것은 문학이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직접적인 이득을 주기 때문에 진화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적응주의 문학론자들은 문학 덕분에 사람들이 중요한 사안에 '주의집중'을 했고 집단 내 결속력을 공고히 다져 왔다고 주장한다.

 

+1307

"소설의 독자는 은연중에 등장인물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는 식의 가치 판단을 내린다. 이런 가치 판단이 본능과 충동을 억누르면서 사람들을 협력으로 이끈다. 사람들이 서로의 감정을 잘 조율하지 않고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협력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1308

전통적인 이야기의 상당수는 '기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스토리텔링이 사회 집단의 유대감을 높이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신화와 전설은 해당 사회를 기능적 동맹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1309

다윈주의 문화 비평 darwinian literary criticism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조지프 캐럴 Joseph Carroll은 이야기의 진화적 기능과 관련해서 시뮬레이션 가설을 조금 더 확장시킨다. 그는 이야기가 그저 위험한 맹수와 마주쳤을 때의 대처 방법 같은 예방 주사 차원이라는 주장을 넘어서서, 사람들의 정서를 규제하고 배양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즉, 스토리텔리의 진화가 가능했던 것은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서적 환경에 대처하는 유연성과 적응 능력을 더 많이 주었기 때문이다. 가령, 우두머리 남성이 화가 났다면 정서적으로 어떻게 대응할는지 이야기를 통해 미리 시뮬레이션해봄으로써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이 허구에 열광하는 것은 정서 규제를 위한 사회 인지적 적응이라고 할 수 있다.

 

+1310

진화심리학자 레다 코스미디스 Leda Cosmides는 사회적 교환 상황에서 사기꾼을 탐지하는 특수한 인지 알고리즘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이론을 전개하고 그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인간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임승차하려는 사기꾼을 탐지하는 데 매우 민감하다는 주장이다. 사기꾼을 탐지하는 일은 호혜적 동맹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적응 문제 중 하나다. 그 밖에 다른 사람을 인식하는 능력, 다른 사람과 접촉했던 역사를 기억하는 능력, 다른 사람의 가치를 비교하는 능력 등도 동맹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인간이 동맹, 우정, 정의, 배신 등을 다른 이야기에 그토록 민감한 것은 이렇게 다 이유가 있다.

 

+1311

인류는 진화의 역사에서 99.9퍼센트의 시기를 수렵채집을 하며 매우 어렵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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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심판하는 신'이라는 개념과 친사회적 행동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추정할 만하다. 노렌자얀은 이 관계를 통해 종교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소규모 사회에서는 친사회적 행동이 종교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가령, 아프리카 최후의 수렵채집 집단인 하드자 Hadza족의 경우, 사후 세계를 믿지도 않고 부족의 수호신은 인간의 선행이나 악행에 무관심하다. 하지만 그들은 사냥을 하거나 일상생활을 영위할 때 서로 긴밀히 협력한다. 왜 그럴까? 하드자족처럼 집단의 규모가 작아서 서로를 뻔히 다 아는 사회는 협력을 촉진하려고 초자연적 힘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익명성이 없는 사회이므로 사기꾼은 발을 디딜 틈이 없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기를 치거나 당할 여지가 생긴다. 따라서 이른바 '무임승차자 free rider'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의 규모와 복잡한 정도는 어느 수준 이상 넘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사회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렌자얀에 따르면, 심판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이 문제의 해결사다. 이 해결사가 꼭 초자연적 존재일 필요도 없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업, Karma'을 믿는 것도 똑같은 심리적 효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1313

고통이 없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고통은 생존력을 높이는 가장 기본적인 적응 기제로 자연이 부여한 복이다. 음식이 없으면 허기를 느끼고, 물이 부족하면 갈증을 느낌으로써 문제 해결의 동기가 생긴다. 몸에 상처를 입었을 때 고통을 완화하려고 휴식을 취하거나 피난처를 찾게 되는 것도 똑같은 이치다. 고통을 느기지 못하면, 생존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피할 수 없고, 남들보다 빨리 사망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사회적 고통도 신체적 고통과 유사한 진화적 기능이 있을까?

 

+1314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외로움도 일종의 고통이다. 외로움을 심하게 느끼면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적당한 외로움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만, 타인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자신의 사회적 연결망에 구멍이 뚫렸는데도 외로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들과 점점 더 멀어지고 결국 외톨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집단생활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영장류 종에게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적 고통을 느끼는 것은 관계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신호로서, 집단생활을 하는 종에게 이득이 되는 진화적 적응기제라 할만하다. 외롭지 않은 자, 그 사람은 비정상이다.

 

+1315

무릎이 까져서 피가 철철 날 때(신체적 고통)와 다른 사람들에게 소외를 당했을 때(사회적 고통), 뇌는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는다. 뇌에게는 그저 똑같은 고통일 뿐이다. 뇌는 고통을 겪게 함으로써 개체를 생존에 더 유리하게 끌고 나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 뇌는 그 사람에게 고통을 줘서 다음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게 한다. 이는 망치질을 하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찧었을 때 벌어지는 뇌의 작동 원리와 본질적으로 같다.

 

+1316

사회적 고통이 신체적 고통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은 집단 따돌림 같은 쟁점에 정책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가늠해 보게 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미국, 영국, 독일, 핀란드, 일본, 칠레 등의 나라에서 집단 따돌림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12~16세 학생들 가운데 정기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이 전체의 10퍼센트이며, 이 중 15퍼센트 정도가 신체적 학대까지 받고 있다. 따돌림 당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언어로 학대를 받는다. 이들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네 배 이상이었다. 또한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생각하는 빈도가 만성 신체적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비슷했다. 다시 말해, 집단 따돌림은 피해자를 칼로 찔러 상처를 입히는 것과 똑같은 범죄다. 집단 따돌림 피해자들이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라고 심경을 토로하는 것은 말 그대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회적 고통을 유발하는 언어폭력이나 집단 따돌림은 이제 범죄로 취급해야 마땅하다.

 

+1317

보엠에 따르면, 대략 2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인류의 조상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평등한 정치 제도를 갖고 있었다. 600만 년 전쯤에 인간과 갈라져 나온 침팬지 사회는 물리력에 근거한 지배 서열을 지금까지 간직해 온 반면, 인간은 80만 년 전쯤에 불을 이용하고 통제하면서, 그리고 20만 년 전쯤부터 치명적인 사냥 도구를 만들면서, 새로운 정치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우선, 다른 종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집단 사냥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 동물의 집단 사냥에는 공정함이 별로 필요치 않다. 함께 사냥하고, 대개 그 자리에서 동료와 같이 먹는다. 물론 서로 빨리 많이 먹으려고 경쟁하지만, 이것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지배 서열이다. 우위자는 열위자의 월권만 막으면 된다. 반면, 인간의 사냥과 분배는 달랐다. 그들은 함께 사냥을 했지만 먹잇감을 그 자리에서 먹지 않았다. 중심지로 가져와서 공동으로 나눈 후에 먹었다. 불을 통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사냥의 일등 공신이나 무리의 우두머리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무리에서 쫓겨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손에 직접 만든 치명적 무기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보엠은 이를 '역 지배 위계 reverse dominance hierarchy'라 부른다. 모든 사람에게 무기가 있으니 힘으로 억누르는 독재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농경은 잉여를 만들어 냈고, 그 잉여는 초기 농경 사회에서 우위를 점한 소수에 편중되었다. 편중된 잉여 자원은 계층 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힘에 의한 지배를 막았던 치명적 무기는 우위자만을 위한 법규와 제도 앞에 무기력해졌다. 다시 침팬지의 지배 서열 사회로 회귀한 것이다. 농경 시대 이후 인류는 사회, 정치적 체제를 통해 불평등을 더욱 공고히 다져 왔다. 다시 평등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염원은 최근 몇 세기 전부터 비로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농경 사회가 만들어 낸 불평등의 관성은 여전히 막강하다. 과연 금수저의 멸절을 목도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1318

사회적 로봇의 출현은 로봇 발전의 역사에서 가히 분수령을 이룰 사건이 될 것이다. 아무리 명령을 잘 따르고 맡은 임무를 불평 없이 수행했어도 지금까지의 로봇은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우리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읽어 내고, 우리에게 어떤 표정으로든 감정 교류를 시도하는 로봇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행위자다. 반려견은 '또 하나의 가족'이 된 지 오래되었다. 감정 교류를 해 왔기 때문이다. 

 

+1319

인간에게 반응하고 인간과 소통하는 로봇은 더 이상 기계 덩어리가 아니다. 그런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머지않아 우리의 현실로 맞닥뜨릴 문제가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까운 미래에 우리 일상에 마주할 어마어마한 충격이라고 생각한다. 그 충격의 원천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의 진화된 초사회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