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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S OF SEEING

 

[밑줄]

 

+58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보는 행위가 말에 앞선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 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를 에워싼 이 세계를 말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든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 저녁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광경과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59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의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사진을 기계적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 사진이 사진을 찍은 사람의 무한히 많은 시각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것은 심지어 매우 일상적인 가족 스냅 사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진가의 보는 방식은 주제 선택에 반영되어 있다. 화가의 보는 방식은 캔버스 또는 종이 위에 그가 그려 놓은 것에 의해 재구성된다. 그러나, 비록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긴 해도, 어떤 이미지를 보고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60

애초에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점차 사람들은 재현한 사물이 사라진 후에도 이미지는 그대로 남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하나의 이미지는 한 때 무언가를 누군가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이와 함께 그것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는지도 보여준다. 나중에는 이미지 제작자의 특수한 시각 역시 기록의 일부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이는 역사에 대한 인식이 점차 커 감에 따라 개성에 대한 자각도 점점 커지는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61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그렇기때문에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를 신비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우리는 과거 속에 살지 않는다. 과거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을 때 필요한 결론들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샘물과 같은 것이다.

 

+62

우리가 현재를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63

한때 우주가 신을 위해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듯이, 가시적 세계는 관찰자를 중심으로 정돈된다. 원근법의 관습에 따르면 시각적 상호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는 타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신은 그 자신이 상황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원근법의 내적인 모순은 신과는 달리 한 장소,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 카메라의 발명 이후 이러한 모순은 보다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64

 

'지가 베르토프'가 1923년에 쓴 글.

나는 하나의 눈이다. 하나의 기계적인 눈. 나, 기계는 단지 내가 볼 수 있는 방식으로만 세계를 너에게 보여 준다. 나는 앞으로 인간의 부동성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나는 사물들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나는 사물들 밑으로 기어 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달리는 말과 나란히 같이 움직일 수도 있다. 나는 추락하고 상승하는 육체와 함께 추락하거나 상승한다. 이것이 나, 기계다. 나, 기계는 이렇게 혼란스런 움직임 속에서 작동하며, 가장 복잡하게 조합되어 있는 여러 가지 움직임을 하나하나 기록한다. 공간과 시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대로 우주의 어떠한 점과도 연결될 수 있다. 나의 길은 세계를 다시 새롭게 지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65

그림이 영화 카메라로 복제되었을 때 그것은 영화 제작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위한 자료가 된다. 한 그림 이미지를 복제한 영화는 관객들을 그 그림을 통해 영화를 제작한 사람의 개인적인 사고로 인도해 간다. 그 그림은 영화 제작자에게 작품의 권위를 빌려 준다.

 

+66

세잔(P.Cezanne)이 화가의 입장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세상의 삶에서 한 순간이 지나간다!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되고, 예민한 감광판이 되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로 남기고, 우리 시대 전에 나타났던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

 

+67

결국 문제시되기만 했을 뿐 아직도 말끔하게 청산되거나 극복되었다고 할 수 없는 오래된 관습이나 관행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여자의 존재는 남자의 경우와는 다르다. 남자의 사회적 존재는,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능력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68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69

거울은 종종 여자의 허영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이용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림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위선적이다.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 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 놓고는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사실 거울의 진정한 기능은 다른 데 있다. 거울은 무엇보다도 여자가 스스로를 하나의 구경거리로 대하는 데 동의하는 것처럼 만들어준다. 파리스의 심판은 벌거벗은 여자를 쳐다보는 남자 혹은 남자들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생각을 보여주는 또 다른 테마다. 하지만 이제 여기에 또 다른 요소가 추가되어 있다. 바로 판정이라는 요소이다. 파리스는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사과를 상으로 준다. 그런 식으로 아름다움은 경쟁적인 것이 된다. (오늘날 파리스의 심판은 미인 선발대회가 되었다.) 아름답다는 판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되고, 아름답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은 상을 받는다.

 

+70

누드(nude)로 보여진다는 것은 자신의 피부 표면과 몸에 난 털들이 하나의 가장(假裝)이 되고, 그런 상황에서 절대로 떨쳐낼 수 없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다. 누드는 절대로 벌거벗은 몸이 될 수 없는 움명이다.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 

 

+71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성애의 이미지 대부분은 문자적으로든 은유적으로든 다 같이 똑바로 정면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적 행위의 주인공이 바로 그 이미지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이자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72

유화를 다른 회화형식과 구분해 주는 것은 묘사되는 대상이 마치 눈앞에 있어서 실제로 손으로 만질 수도 있는 물건인 것처럼, 그 질감, 광채, 입체감 등을 표현해내는 능력이다. 유화는 실제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규정한다. 비록 그려진 이미지는 이차원적이지만, 실제 사물의 모습과 똑같다는 느낌은 조각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화는 그려진 대상들이 색상과 질감, 온도를 지니고 있으며, 하나의 공간을 차지하고, 나아가 전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73

대략 열여섯 살 때부터 전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에 적합한 작업방식을 공부했던 도제나 학생이 예외적인 화가가 되려면, 자기나름의 독자적인 시각이 중요함을 깨닫고 전통적인 관습이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키워 나가야만 한다. 혼자 힘으로 자기가 이제까지 배워 온 예술의 규범에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로서의 시각을 거부하는 화가로 스스로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 말의 의미는 그동안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74

광고란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 것이다.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 의해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glamour)인 것이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당신을 관심을 갖고 보지만 당신은 그들을 관심을 갖고 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선망을 덜 받게 될 것이다.

 

+75

광고 언어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까지 사 세기 동안 서구적인 시각방식을 지배해 왔던 유화와 어떤 관계가 있던 것일까. 이런 질문은 단지 질문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게 한다. 두말할 것 없이 오늘의 광고 언어와 유화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속성이 있다. 단지 문화적인 품위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이 연속성이 모호해지는 것이다. 

 

+76

마네킹의 몸짓과 신화적 인물들의 모습. 천연 그대로의 순결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자연(나뭇잎들, 나무들, 물)의 낭만적인 이용. 지중해의 이국적이고 향수 어린 매력, 흔히 여인을 상징하는 포즈들, 이를테면 온화한 어머니(마돈나), 바람둥이 비서(여배우, 왕의 정부),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안주인(관객 겸 소유자의 부인), 성적인 대상(비너스, 남성의 습격을 받은 님프) 등. 성적인 것을 강조한 여자의 다리. 사치를 상징하기 위한 특별한 물건들, 예를 들어, 조각된 금속 조각, 모피, 윤기가 흐르는 가죽제품 등. 관객의 눈에 띄도록 앞쪽에 배치한 연인들의 모습과 포옹. 새로운 삶의 생기를 북돋워 주는 바다. 부와 정력을 상징하는 남자의 신체적 자세. 원근화법으로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거리감의 처리법. 음주와 성공의 동일시. 말 탄 옛날 기사가 자동차를 모는 사람으로 바뀜. 왜 광고는 이렇게 유화의 시각적인 언어에 깊게 의존하게 되었을까.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다. 광고는 이미지를 통해 바로 이 소비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신념을 선전한다. 이 이미지들이 유화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화란 무엇보다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형식이다.

 

+77

마침내 기술의 발전으로 유화의 언어는 쉽게 광고의 상투어로 바뀌어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약 십오 년 전 값싼 컬러사진이 발명되면서부터이다. 이러한 사진은 사물들의 색과 질감 및 입체감까지도 실감나게 재현해낼 수 있다. 과거에는 유화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유화가 그 그림을 소유하는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 것처럼, 컬러사진은 광고를 보는 구매자들과 관계를 갖는다. 이 두 가지 매체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고도로 촉각적인 수단으로서, 그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실제의 사물들을 획득했다는 느낌을 보는 사람에게 준다. 두 경우 다 이미지 안의 것을 손대고 만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고, 이 느낌이 그로 하여금 진짜 물건을 소유하거나 소유한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언어로서의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광고의 기능은 유화의 기능과는 꽤 다르다. 광고를 보는 구매자와 세계와의 관계는 , 유화를 소유한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와는 아주 다르다. 유화는 소유주가 자신의 소유물들과 생활방식을 통해 이미 향유하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치있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더욱 확고하게 갖도록 한다. 유화는 기존의 자기 자신이 좀 더 잘난 존재라고 느끼도록 해준다. 그것이 사실들, 즉 그의 생활의 실제에서 시작되었다. 그림은 그가 실제로 살고 있던 저택의 내부를 꾸며주는 것이었다. 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적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적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만일 그가 광고하는 물품을 구입한다면 그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광고는 그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78

모든 광고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돈이 전부이고, 돈을 벌어야 불안감이 사라진다. 광고는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라는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이를 이용한다. 돈은 곧 삶이다. 돈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생활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자본에서 생겨난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돈이 모든 인간 능력의 상징, 열쇠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돈을 쓰는 능력이란 곧 사는 능력이다. 광고의 선전에 따르면, 돈을 쓰는 능력을 잃으면 문자 그대로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능력이 있어야 사랑받을 수 있게 된다.

 

+79

광고는 미래 시제로 얘기하지만, 그 미래의 달성은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광고가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질 만큼 믿음직하게 보이게 되는 것일까.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광고는 본질적으로 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백일몽에 적용된다.

 

+80

의미 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의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 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적인 행동에 의해 대치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적인 남녀 노동자는 능동적인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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