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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무게

Das Gevicht der Worte

 

[밑줄]

+2092

글쓰기는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확성과 이해를 만들어낸다. 또는 그런 착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언어에 운이 좋은 사람은 스스로를 향해 눈을 뜨는 것과 같아서 새로운 시간을 경험한다. 시의 현존이라는 시간이다.

- 페드루 바스쿠 드 알메이다 프라두 <시의 시간> 1903, 리스본

 

+2093

여행 가방 바퀴들이 포장석 위를 굴러가며 덜컹거렸다... 레이랜드는 창가 우묵한 벽감에 앉아 건너편 집을 바라봤다.

 

+2094

사람들은 아마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다고 기대하겠지.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니까.

 

+2095

"때가 되면 이 편지를 당신에게 주라고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이게 진짜 유산이라고 하셨지요."

"서명할 때 커다란 확대경을 가지고 오셨더군요. 그것 말고는 환자 같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루해 보였을 뿐."

"떠나기 좋은 이유지요, 최고의 이유."

 

+2096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나나 세상에 없을 테지. 나를 이루었던 물질이 재가 되어 미가 오면 서서히 정원 흙에 묻혀 들어가서 다른 생명체들과 연결되게 케네스 버크가 처리했을 거야. 이 생각을 하면 늘 구원과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지. 

 

+2097

회고록 형식도 괜찮지만, 이야기 형식이 더 좋겠지. 내면 가장 깊은 것을 주인공들이 촘촘한 시적 형태로 경험할 수 있으니까. 나는 네가 이 일에 필요한 솔직함과 단호함을 갖추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아무도 네 계획을 알 필요는 없다.

 

+2098

'홈home'이 올바른 단어라면, 이 집이 그렇게 되길.

 

+2099

이제 편지를 맺을 때가 됐다. 일주일 동안 썼는데, 쓰고 나면 눈이 정말 아플 때가 많았다. 이게 내가 쓰는 마지막 글자다. 나는 어느 나라 알파펫이 됐든 정말 한 글자 한 글자 쓰길 좋아했다. 언어적인 상징, 정신의 신비인 글자를.

 

+2100

지금 일어난 일이 무슨 뜻인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채게 도와줄 문장이 떠오른다면.

 

+2101

"우리가 사는 곳은 날씨가 너무 온화해." 그는 자신이나 위기에 처한 삶보다 뭔가 더 위대한 것, 더 의미 있는 것으로서 자연을 경험하고 싶었다.

 

+2102

'내 인생의 시간으로 뭘 했던가?'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2103

그에게서 이따금 터져 나오는 것은 가차 없는 정직함, 사납고 씁쓸한 정직함의 한 예였다. 이 정직함은 멈출 수 없이 줄어드는 미래에 맞서는 정당방위, 구체적인 상대방이 없는 정당방위였다. 배려와 섬세한 감정이라는 장애물을 모두 파괴하고 범람하는 정직함, 우박 폭풍 같은 정직함이었다.

 

+2104

하지만 난 처음부터 권위가 있었어. 타인의 말과 눈빛에서 그걸 알 수 있었고, 타인의 판단을 따라야 할 때는 자유로운 느낌으로 그렇게 했어. 그러니 지금 '권위자는 없다'라고 생각할 때 느끼는 분노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난 어떤 종류의 자립성을 놓쳤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거지? 종말을 목적에 두고, 난 어디에 맞서서 달리는 걸까?

 

+2105

'탁월하고 위대한 세계', 그때를 추억할 때면 리비아가 하는 말이었다.

 

+2106

무척 우아한 정장과 신발을 갖춰 신고 다가오는 그녀는 눈에 띌 만큼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오만해 보였지만, 그는 이 태도가 카네리나가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는 일종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2107

킬로이는 길에서 담배를 오랫동안 밟아 비벼 끄면서 레이랜드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나 추억을 일단 끝내야 한다는 듯이 망설인 다음에 찾아온 끄덕임이었다.

 

+2108

물론 파베세의 글에는 삶의 정비 방식에 대한 절망과 차분한 단념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자주 보인 것은 삶을 성취하는 문제에 관해서였다. 옳거나 그른 성찰, 옳거나 그른 행동, 삶을 다루는 능력과 무능력, 배움과 통제가 중요했다.

 

+2109

그러다가 자신이 부드럽고 따듯한 인상보다 각지고 오만한 인상을 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오히려 더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놀랐다.

 

+2110

"이따금 나는 만남, 특히 첫 만남은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알지 못하던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2111

레이랜드는 바로 그 순간 '의지' '결의'가 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런 눈빛을 한 사람은 그 누구도 막아서지 못할 터였다.

 

+2112

'너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네 언어로 말하는 걸 도왔다. 그들에게 네 언어의 목소리를 주었고, 네 언어가 그들 자신의 목소리가 되게 해 주었다. 네 언어에서 네 목소리는 어떠하지? 너 자신은 어떻게 울릴까?'

 

+2113

"마치 그가 시간을 멈추거나 차단하려는 것처럼 보였지. 얼마 전에 그런 현상을 또 한번 명확하게 경험했을 때, 나는 그게 자기주장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어. 쿠츠민은 다른 사람이 속도를 정하는 걸 저지했던 거야. 다른 사람들은 거의 눈치챌 수 없이 작은, 아무 미세한 반란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중요한 자유의 경험이었다. 교도소에서조차 빼앗을 수 없는 자유."

 

+2114

우리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우리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줘.

 

+2115

어떤 사람이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너무나 부끄러워하는 일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레이랜드는 자신이 일반적으로 창피함이라는 감정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116

"그때 거리로 나서서 이른 오후의 눈부신 햇살을 마주한 나는 뭔가 기이한 경험을 했어." 레이랜드가 말했다. "그게 그냥 느낌이었는지 아니면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어. 지금 나온 방향보다 아까 햇빛에서 교도소의 그늘로 들어설 때가 눈이 더 부시고 아픈 것 같았지. 나는 마음속으로 이 모순을 '어둠에 눈이 부시다'라고 표현했어. 

 

+2117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채 번역에 열중해 모든 걸 잊었다가, 깜작 놀라 시계를 볼 때가 있어.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상실감이나 무언가를 놓쳤다는 느낌이 아니야. 내 안의 시간,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살아냄으로써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났다는 행복에 겨운 놀라움이고 해방감이지.

 

+2118

관이 땅속으로 내려갈 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허사라는 허망함이 나를 엄습했어... 삶이 허망하지 '않은' 때는 언제일까?

 

+2119

내가 그다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던 것 같아서 두려워. 당신은 어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불가피하게 깊은 흔적을 남기고, 아이들은 그걸 찾아내고 해석하느라 평생을 보내기도 하지.

 

+2120

내가 나였던 게 얼마나 오래전인지 떠올려보면 정말 기이해. 내가 여전히 그때의 나라는 사실도 무척 놀라워. 나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서 오늘날의 나까지 왔다는 것도 깊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2121

"자네가 오면 반갑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런 방문이야."

 

+2122

'이제 드디어 이 책이 요구하는 대로, 또 책의 가치에 맞게 천천히 읽을 수 있게 됐다'

 

+2123

레이랜드는 그 선명함을 붙잡고 싶었다. 타인의 소망이 자기 자신의 의지를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그런 일도 있었다. 타인의 단호함이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을 던져주므로.

 

+2124

그분이 견디지 못하는 건 사람들이 남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거예요... 계몽된 사람은 두 가지 질문을 언제나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나는 정확하게 무슨 생각을 하는가?'와 '왜 그렇게 생각하나?'였어요.

 

+2125

탁월한 연설가인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고를 내려놓고 강당에 가득한 청중 앞에서 세심하게 짜인 문장을 자유자재로 이야기했다.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왔다 갔다 움직이며 시선이 한 줄 한 줄 모든 청중에게 닿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그는 자기 생각을 엄청난 통찰력으로 설명했는데, 청중은 그의 생각이 광대한 유리 건축물을 만든다는 인상을 받았다.

 

+2126

하지만 법학은 사실 재미있고 매우 생생한 학문입니다. 서로 신뢰하고 정의롭게 지내려면 우리의 공생을 어떻게 조율해야 하는가라는 중요하고 흥미로운 문제를 다루니까요.

 

+2127

'할 수 없다'는 두려움일 리는 없을 테지.

 

+2128

최후의 작별에 익살이라... 덧없는 자아도취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게 타인의 판단이라니. 자살의 진정성에 모순되지 않나? 이 진정성에 구멍을 내는 행위 아닌가? 그 생각을 곰곰이 하면 거의 화가 날 지경이라네.

 

+2129

시적인 것은 우리 삶에 평소와 다른 깊이를 준다고. 그때의 삶은 우리가 전혀 말을 얹지 않아도 그 전체가 중요해진다고 했지.

 

+2130

우리 인간은 매끈한 완전체가 아니라 가느다란 틈과 금이 가득한 존재고, 내면의 다양한 고원들에 올라갔다가 추락하며 살아.

 

+2131

계속하기. 매일 계속하는 게 중요합니다.

 

+2132

현재를 온전히 공유하는 소중한 나날이었다. 이런 시간이 언젠가 지나가리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2133

패트는 익숙한 환경이라는 지팡이를 빼앗겨서 살짝 비틀거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2134

'질병과 다가오는 최후에 대해 안다는 것. 특히 아침 무렵에 가장 힘들다네.'

 

+2135

언제나 이럴까? 상상력이 놀랍고 이해하기 어려운 길을 가며 만들어낸 장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흩날려 사라져버릴까? 이게 이야기꾼의 일상다반사일까?

+2136

어쩌면 나 자신의 목소리를 시도하기란 나에게 너무 벅찬 일인지도 몰라. 재능 문제지. 아니면 다른 이유일지도 모르고. 나 자신의 언어를 만난다는 공포.

 

+2137

아니면 다른 이ㅖ전에 내가 그다지도 좋아하던 그녀의 걸음걸이조차도 낯설더군요.

 

+2138

곧 자정이야. 오늘 내 첫 소설에서 겨우 두 단락을 썼어. 하루 종일 걸렸지.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이제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야!

 

+2139

반복되는 수많은 일도 나를 지치게 만드네. 늘 똑같은 과정, 자주 나누는 똑같은 대화, 똑같은 손님들. 인생이 그저 요란한 의식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아. 저녁에 집에 올라가면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감정을 이따금 느껴. 지겨움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2140

그녀는 휠체어를 굴려 퐁텐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고 말했다. "언젠가는 인정하는 걸 배우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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