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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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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밑줄] +2324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2325 나는 또한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태연함과 그것이 내 삶에서 차지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비중에 크게 놀랐다. +2326 그 사람은 천천히 옷을 입으며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양말을 신고, 팬티와 바지를 입고 나서 넥타이를 매기 위해 거울 앞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재킷만 걸치면 저 사람은 떠나겠지.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2327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밑줄] +2089 장소 하나 바꾸는 것이, 우리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마치 꿈을 잊는 것처럼 깨끗이 잊어버리게 만드는 데 그렇게 많은 기여를 한다면, 그거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 칼 필립 모리츠 [안톤 라이저] +2090 반면에 일상적인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섬세한 움직임에는 호감이 간다. 이를테면 적절한 순간에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꺼내는 이별의 몸짓, 단호한 대답을 대신하는 정중하면서도 공감이 묻어나는 얼굴 표정, 종업원이 건네주는 거스름돈을 돌려줄 때의 근사한 제스처. +2091 "우리는 꿈은 거의 안 꿔요." 존 포드가 대답했다. "꿈을 꿔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평소에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말하기 때문에 꿈속으로까지 가져갈 게 없죠."
행복의 충격 [밑줄] +1599 몸은 암울한 유신체제의 서울로 돌아왔지만 가슴속에는 여전히 지중해가 출렁거리고 남프랑스의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1600 "바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 +1601 교양이나 시직이나 견문을 넓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 책은 또한 능률적이고 경제적인 여행안내에도 기여하지 않는다. +1602 청춘은 그 자체가 자기 스스로의 정당화가 된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이 특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오면 우리들의 모든 변명에도(지혜라든가 조심성이라든가 분별 같은 것의 이름으로)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늙기 시작한다.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것들의 수가 늘어나고, 속 깊은 공포감을 안락의 방 속에 감추려 한다. 그리고 늦가을 바..
바람을 담는 집 [밑줄] +284 "나는 정의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정의가 나의 어머니에게 총부리를 겨눈다면 나는 어머니의 편을 들겠다!" 여기에 카뮈의 인간적인 교훈이 있다. +285 "그러나 우리가 이대로 패배하기엔 너무나 많은 내일이 남아있다. 천치와 같은 침묵을 깨치고 퇴색한 옥의를 벗어던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유혹이 있다. 그것은 이 황야 위에 불을 지르고 기름지게 밭과 밭을 갈아야 하는 야생의 작업이다. 한 손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또 한 손으로 모래의 사태를 멎게 하는 눈물의 투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전민이다. 우리들의 어린 곡물의 싹을 위하여 잡초와 불순물을 제거하는 그러한 불의 작업으로서 출발하는 화전민이다. 새세대 문학인이 항거해야 할 정신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항거는 불의 작업이며 불의..
설계자들 [밑줄] +226 요즘엔 사람들이 모두 쥐새끼처럼 작아지고 약아져서 느리고 거대하며 아름다운 발자국들은 다 사라졌다는 게야. 거인이 사라진 세상이 된 것이지. +227 좋은 정원이다. 마당에 감나무 두 그루가 딴청 피우듯 서있고 구석의 화단에는 자신의 계절을 조용히 기다리는 꽃이 있다. +228 식물의 뿌리처럼, 세상의 모든 비극은 자신이 발 디딘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래생은 자신이 뿌리내린 바닥을 떠나기에는 너무나 어렸다. +229 우리는 더럽고 역겹지만 자신이 발 디딘 땅을 결국 떠나지 못한다. 돈도 없고 먹고 살 길도 없는 것이 그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가 이 역겨운 땅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그 역겨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역겨움을 견디는 것이 더 황량한 세계에 홀로..
캐비닛 [밑줄] +187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188 "버드와이저는 싸구려맥주예요." "괜찮아요. 제 인생도 싸구려거든요." +189 하하.허허.헤헤 젠장, 도무지 박자가 안맞다. 웃을 때는 다 같이 웃어야 하는데, 억지로 웃어준 티가 너무 난다. 모두들 머쓱하다. 이런 액션을 한번 취하고 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