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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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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

새벽 1시 30분께 화재는 진압되었고 서형진 소방사는 동료들의 들것에 실려 지휘관 앞으로 운구됐다. "장비를 벗겨주어라"라고 정 서장은 말했다. 대원들은 서형진 소방사의 무장을 해체했다. 공기호흡기, 도끼, 망치, 손전등, 안전모, 개인 로프를 떼어주고 방열복을 벗겨주었다. 그는 그렇게 한평생의 멍에를 벗었다.

28일의 영결식에서 그는 소방교로 추서되어 국립묘지로 갔다. 그가 세상에 남긴 젖먹이 아들의 이름은 서정환이다. 그의 장례식 다음날이 정환이의 백일이었다. 화재피해를 입지 않은 1층과 3층은 다음날부터 정상영업을 계속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는 온통 장관부인들의 고급 옷에 관한 것뿐이었다.

 

+1416

다 함께 건너갈 수 없으니 우리가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겠다. 제발 이 위태로운 배에서 내려 달라. 우리는 저편 언덕의 안전지대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다시 강을 건너서 당신들을 구출하러 오겠다. 그때까지 당신들은 홍수로 쓸려가는 이 물가에서 우리를 기다려 달라. 대체로 인간은 이 같은 설득에 감동되지 않는다. 이 같은 논리의 과학성은 먼저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자기정당화에 기여할 뿐, 강가에 남는 사람들의 희망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1417

자식을 기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부양기간은 길어진다. 재수하고 군대 갔다 와서 취직 못하면 서른이 넘도록 먹여주어야 한다. 아무리 길러도 자라지가 않는 것 같다.

대학 졸업식 풍경은 심란하고 또 한심하다. 지난주에는 그 심란한 행사 때문에 온 시내의 길이 막혔다.

 

+1418

캄차카의 툰드라숲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새들은 또 어느 아프지 않은 세상을 찾아서 바다를 건너가는 것인지. 한 마리가 날아오르면 천 마리가 날아오르고 한 마리가 버스럭거리면 만 마리가 버스럭거리니, 저 날개 쳐서 세상을 뜨는 것들의 세상에서 유언비어는 흉흉한 모양이다.

 

+1419

모든 언어는 또 다른 언어에 의해 부정당하는 가엾은 운명을 넘어서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정당하고 무너지는 과정의 성실성의 흔적조차도 당대의 말 속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1420

글쓰는 자의 적은 끝끝내 그 독자들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영원히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일 뿐이다.

 

+1421

대통력의 정액을 기어코 확인하는 것은 나라의 위상을 훼손하는 일이며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미국 내 여론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 파멸적 치욕과 조롱을 감수해가며 기어코 대통령의 정액을 확인해냈다. 그 과정은 치욕의 사실을 사실로서 정립함으로써 치욕을 씻어내는 장엄한 드라마였다. 그리고 미국은 그 말라빠진 정액 몇 방울의 흔적에 근거하여 사태를 인식하고 수습해나가는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422

다들 격렬한 언설을 한바탕씩 토해낸 다음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후렴으로 달고 있다. 이 말은 내 편이 더 많다는 전략적 선전에 불과하다. 이때의 국민은 허수아비와 똑같다. 사실의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국민'이 무엇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 사실관계를 국민이 판단해야 한다면 검찰은 왜 있고 국회는 왜 있으며 언론은 왜 있는가.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라는 협박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파시즘에 불과하다.

 

+1423

초로의 나이에 겨우 혼자서 쓰기 공부를 시작한 백면의 서생일 뿐입니다. 이런 은성한 상을 받게 되는 일이 팔자에 없어도 좋았고, 또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돌연 사유의 전환이나 확장이 있을 리 없으니, 이런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덜 민망할 것인지 난감한 일입니다.

무리를 아늑해하지 않으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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