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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세계사

[밑줄]

네안데르탈인에서 신자유주의까지 <좌파 세계사>

+1473

호미니드는 250만 년 전에 시작된 빙하시대의 존재였다. 빙하시대 기후는 변화가 심했다. 추운 빙하기와 상대적으로 따뜻한 간빙기가 교차되었다. 우리는 현재 간빙기에 살고 있지만 2만 년 전 북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은 두께가 자그마치 최대 4킬로미터나 되는 얼음으로 뒤덮인 빙하기에 속했다. 겨울이 9개월간 계속되고 영하 20도 이하의 온도가 몇 주 동안 지속되는 기후였다.

 

+1474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슈퍼 호미니드가 에렉투스 라인으로부터 진화했다. 이들은 창조성, 집단적 조직, 문화적 적응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8만 5000년 전 무렵 아프리카에서 이동하기 시작해 전 세계로 빠르게 퍼졌고 결국 세계의 가장 먼 구석까지 점령했다. 이 새로운 종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현생 인류)였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모든 호미니드 원시 인류와 경쟁해 전부 멸종시켰다.

 

+1475

BP 1만 년쯤 문제가 생겼다. 호미니드가 매머드, 큰뿔사슴, 야생마 같은 거대한 짐승들을 너무 많이 사냥한 탓에 이들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얼음평원은 사라지고 대신 숲이 우거지고 있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세계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기존의 생활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진화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가장 큰 시험에 직면한 셈이다.

 

+1476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빙하시대 250만 년 동안 빙하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1477

아시아의 건조지역에서는 좀 더 혁신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새로운 방식의 식량 채집이 아니라 식량의 '생산'이 필요했다. 사냥꾼들은 오랫동안 먹잇감들과 공생관계에 있었다. 먹잇감을 위해 숲 속에 빈터를 만들어주었고, 이동경로를 마련해주었으며 식량을 제공했고 그들을 노리는 맹수를 막아주기도 했다. 사냥을 하더라도 새끼들은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풍부한 사냥감을 가까이 두는 것이 그들에겐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점진적으로 동물을 사냥하는 방식에서 목축으로 옮겨가게 됐다.

 

+1478

전쟁은 서로 맞서는 집단 사이에 대규모 폭력이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기원전 7500년경에 시작된 농경 혁명 이전에는 이 같은 전쟁의 증거는 없었다.

 

+1479

고고학자들은 영국에서 최초의 전쟁이 일어난 시기를 기원전 3500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 시기는 신석기 혁명이 시작된 지 겨우 몇 백 년 뒤다.

 

+1480

인간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힘을 갖고 있다고 상상하는 존재에게 간청(기도)과 제물(희생양)을 바치는 방식으로.

 

+1481

초기 신석기 경제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서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기술은 원시적이었고 낭비는 심했다. 사회는 자연재해와 고통의 시간을 견뎌낼 만큼의 여유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 처녀지는 소진되었고 오래된 들판도 고갈되었으며 인구는 자꾸 늘어만 갔다. 전쟁은 이런 모순들이 분출된 결과였다. 전쟁을 통해 다른 집단의 재산을 빼앗는 방법으로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482

호모 사피엔스를 규정하는 가장 큰 특징은 뭔가를 발명하는 창의력이었다. 현생 인류는 새로운 도구와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자연의 도전에 응전했다. 그들은 적응하는 일에 적응했고 문화적 혁신을 통해 번영을 이루었다.

 

+1483

전문화는 노동을 집안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상인들은 구리, 흑요석, 용암, 장식용 조개껍질, 보석 같은 것들을 들고 먼 거리를 여행했다. 선사시대의 수공예인들은 나중에 자신들의 역사적 후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기술을 여기저기서 팔았다. 그 결과 마을이나 씨족, 부족 간의 유대는 약해졌다. 기존의 친족 중심의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고객 관리나 교역에 바탕을 둔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다.

성 역할 역시 바뀌었다. 사회집단이 살아남고 번성하려면 노동력을 떠받칠 어린이와 청소년의 공급이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 당시에는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에 노동력을 제공하려면 젊은 여성들이 많은 시간을 임신과 수유에 할애해야 했다. 그러나 구석기시대 채집과 초기 신석기시대의 괭이 농경은 양육을 함께 겸할 수 있는 노동이었던데 반해, 후기 구석기시대의 쟁기질 농경은 그럴 수 없었다.

수렵채집과 초기 농경사회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다른 역할을 했지만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성별로 노동의 구분은 있었지만, 여성 차별은 없었다.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채집을 하고, 모두 모여 거처의 이동 같은 중요한 문제를 함께 의논했다. 오늘날 같은 핵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신석기시대 롱하우스에는 확대 가족이 함께 살았다. 집단 결혼이 아마도 흔한 풍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자는 처가에 거주했고, 모계 혈통 위주로 가정이 꾸려졌음이 거의 분명하다.

 

+1484

고대 수메르의 영토는 덴마크 정도의 크기였다. 풍요로운 땅을 경작하기 시작하자 토지에서 엄청난 잉여 농산물이 생겼다. 덕분에 촌락 중심의 생활이 도시 중심으로 바뀌는 질적인 이동이 가능해졌다. 수메르의 이런 성취에 대해 유명한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도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485

민주주의 혁명의 진앙지는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였다. 기원전 506년부에서 510년 사이, 도시 내부의 혁명적인 계급투쟁에 힘입어 독재정치는 민주주의로 전환되었다.

 

+1486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거의 2세기 동안 지속됐다. 그리스 세계를 가로질러 다른 도시국가들도 아테네를 따라하게 되었다.

 

+1487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페리클레스는 도시의 정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권력이 소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전체에게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계급의 구성원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실제 능력이다... 아무도... 가난 때문에 정치적인 은둔에 갇혀있지 않다... 우리 스스로 권위의 자리에 앉힌 그 사람에게 우리의 충성을 바친다...

 

+1488

정치적 불안정은 결국 제국주의를 낳았다. 왕의 권력은 충성을 바친 자에게 부를 나눠줄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1489

'신분투쟁'의 시기가 지나간 뒤 로마는 국내에서는 안정이 유지됐지만, 대외적으로는 기원전 3~2세기에 걸쳐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자국의 안정은 해외 침략에 의존했다. 사회적 평화는 제국주의적 잉여를 통해 유지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로마는 기원전 7세기경 작은 라틴 도시국가에서 2세기 후반에는 고대의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1490

로마의 혁명은 특이했다. 불만 세력 중 어느 계급도 운동을 지배하지 못했다. 어떤 계급도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일관된 비전과 전략을 내세울 리더십을 구축하지 못했다. 아무도 혁명적 대안을 제공하지 못했다. 귀족은 일반 대중을 두려워했고 자산에 위협일 될까봐 우려했다. 소농은 땅 없는 빈민으로 전락할까봐 두려워했다. 자유 시민들은 노예의 반격을 우려했다. 로마 사람들은 이탈리아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로마 시민으로서의 특권이 희석될까봐 두려워했다. 대중운동은 따라서 모순으로 가득 찬 여러 계급 간의 동맹이었다. 이 때문에 로마 혁명을 복잡했고 왜곡되었으며 100년간이나 지속되어야 했다.

 

+1491

로마제국은 시민권과 제국주의의 강력한 융합을 잘 보여준다.

 

+1492

제국은 정복전쟁으로 보조적인 수입을 얻고 있었다. 승자들은 패배한 쪽의 재산을 강탈해 부를 쌓았다. 희생자들은 국가, 군대, 부자들을 지원하는 데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했다. 제국이 계속해서 확장하는 한, 해외에서 빼앗아 오는 만큼만 내부적 착취가 완화되었다.

그 체제는 근본적으로 팽창주의적이었다. 외국의 잉여를 군사적으로 전유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잉여를 지속적으로 획득해야만 체제는 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제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할 때마다 제국의 체제가 침체 혹은 위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도 다른 착취 대상이 필요했다.

 

+1493

그리스-로마 제국의 문명이 지닌 한계는 철기시대 농업의 한계와 일치한다. 철기시대 기술은 시리아에서 영국 남부까지, 유럽의 라인강과 다뉴브강에서부터 북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맥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서 쟁기를 기반으로 한 농업을 만들어냈다. 이 일대는 경작지와 마을,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이 가득한 풍요로운 땅이었다. 잉여는 컸다.

이런 잉여를 획득하기 위해 사회를 조직한 사람들은 군대와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농경지가 끝나면 황무지가 있었다. 영국 북부의 언덕, 독일의 숲,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북부의 사막 등이 그것이다. 제국의 군대가 황무지로 진격해 들어갔지만 광야에 흩어진 채 게릴라전을 펼치는 적들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설사 그들을 정복한다 해도 그들의 생활이 너무나 피폐해서 큰 수익을 얻어낼 수 없었다.

 

+1494

국가는 남자들 중심의 무장된 조직으로서, 새로운 재산에 기반을 둔 현재의 상황을 보호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이렇게 되자 권력을 갖게 된 쪽은 남자들이었다. 밭을 갈고 가축을 모는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었기 때문이다. 

 

+1495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역사적인 여성의 패배'라고 설명한 이런 변화는 신화와 의례에서도 드러났다. 옛 시절의 어머니-신은 왕좌를 빼앗겼고 남성의 권력-신성의 새 세대가 그 권좌를 차지했다. 그리스의 천국은 제우스가 통치했고, 로마의 하늘은 주피터가, 유대인의 하늘은 야훼가, 아랍인의 하늘은 두샤라가 지배했다.

 

+1496

제국의 폭력과 착취가 이렇게 종교적인 외형을 띠고 있었던 것처럼, 억압받는 이들의 저항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화는 사회적 질서를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회에 대한 저항을 고무할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고대 신앙은 두드러졌다. 여러 세기 동안 투쟁을 거치면서 그것은 반문화적 저항의 무기가 되어갔다. 그 믿음은 고난에도 굴하지 않았고, 뿌리 뽑히지 않았으며, 팔레스타인 평민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후 그것은 두 개의 후손을 낳았는데 그 역시 이데올로기 투쟁의 무기가 됐고, 세 가지 종교적 믿음은 결국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게 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바로 그 종교들이다. 

비록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끊임없이 변형될 여지가 있었지만 세 가지 유일신 종교는 고대세계의 모순 때문에 만들어졌다. 이들 종교가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것은 억압받는 자들의 신화와 의례에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1497

과거에 유대인 선지자들은 거짓 우상을 맹렬히 비난했었다. 그러나 바빌론 유수를 거치며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좌절된 민족주의는 통치자 야훼를 전세계의 지배자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정치적인 무능을 종교의 과대망상적인 신성을 내세움으로써 대신한 것이다. 여러 신을 모시는 다신 종교가 아니라, 전능하고 유일한 신이 한 분 있어서 역사는 그 유일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며, 하나님을 꾸준히 믿고 복종하면 특별한 은혜를 받아 최후에 승리하게 되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1498

고대의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제국들처럼, 비유럽 지역 중동제국들은 강력한 지배계급의 장악 아래 유지되었다. 지배계급은 제국의 통치를 통해 독점적으로 잉여를 통제하고 그것을 비생산적인 낭비로 돌릴 수 있었다. 발전된 기술은 노동이 아니라 전쟁에 활용됐고 인류의 창의성은 억압받고 둔화되었다.

 

+1499

이슬람제국은 무하마드 사후 첫 번째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의 영도 하에 통일을 유지했지만, 두 번째 칼리프 우마르는 AD 644년에 살해됐고 세 번째 칼리스 우스만, 네 번째 알리 역시 각각 656년, 661년에 죽임을 당했다.

 

+1500

우스만과 무아위야는 오늘날의 수니파 무슬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알리-후세인은 오늘날의 시아파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1501

농민 반란은 파괴적이었지만 건설적이지는 않았다. 농민들은 가난과 약탈로 절망에 빠져, 세금 관리들을 뒤집어엎기 위한 민병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곧 자신들의 마을로 흩어졌다. 농민들은 광대한 시골 마을에 떨어져 살며 가족과 농장만 생각했다.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더 넓은 세계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의 계급으로서 스스로 대안적인 국가를 상상해내지 못했다. 따라서 농민들이 바라는 최선이란 '나쁜' 황제를 '선한' 황제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혁명적인 리더십을 제공할 수 있는 도시 계급 즉, 부르주아, 인텔리겐챠 혹은 프롤레타리아가 없었기 때문에 반란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었다.

정치적 혁명은 사회적 변혁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단지 하나의 왕조가 다른 왕조로 계속 바뀔 뿐이었다. 2000년의 세월 동안 중국 역사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회전문 역사였다. 세계와 맞닥뜨려 제국의 전체 체제가 무너질 만한 충격을 받기 전까지 이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20세기나 되어서야 생긴다.

 

+1502

유라시아 대륙은 거대한 동서양의 주요 통행로로 길이가 9600킬로미터가 넘는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과 사상이 이 통행로를 따라 이동했다. 유라시아는 동서로 뻗어 있기 때문에 통행로가 단일한 기후대를 따라 형성되었다.

 

+1503

아프리카는 사정이 달랐다. 아프리카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6500킬로미터 길이의 대륙이다. 아프리카는 여러 가지 다양한 기후대를 거치고 큰 장벽을 넘어서 가야 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해안, 평야, 사막, 사바나, 열대 우림, 사바나, 사막 그리고 다시 해안 평야 같은 다양한 기후대가 펼쳐진다.

 

+1504

온갖 다양하고 이국적인 생물은 있었지만 정작 아프리카 동물들 중에는 질병에 강하고 쟁기를 끌 만한 동물이 없었다. 이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아프리카는 유라시아와는 다르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제약조건이 클수록 기회는 적다. 아프리카인들은 로마, 아랍, 중국인들처럼 위대한 예술, 그림, 건축과 기계를 만들 능력은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 장애 때문에 위대한 제국 문명을 건설하기는 힘들었다.

농업 발전은 더디고 고르지 못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는 나일강 유역이나 메소포타미아, 인더스나 갠지스, 황허나 양쯔강과는 사정이 달랐다. 제국을 먹여 살릴 거대한 빵바구니가 없었다.

 

+1505

고대와 중세의 아프리카는 흔히 '불균등 결합발전'의 극단적인 예다. 아프리카에는 수렵채집인들, 가축 목축인들, 화전 경작인들이 공존했다. 이들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지리적 조건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 무역의 영향을 받으면서 아프리카는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바로 도약했다. 청동기 시대를 건너뛴 것이다.

 

+1506

아프리카는 가장 오래된 대륙이며, 아메리카는 가장 젊은 대륙이다. 그러나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중요한 특징을 공유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두 대륙과 유라시아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비슷한 방식으로 지리적인 장벽의 제약을 받았다.

아메리카는 북-남 거리가 거의 1만 6000킬로미터나 되는데, 모든 기후대를 거쳐 간다. 때문에 아메리카의 한 지역에서 작용했던 것이 다른 지역에서도 통한 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생태 시스템은 서로 다른 생존 전략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서로 다른 기후대 간의 문화 교류가 지니는 가치는 기후대 내부에서 이뤄지는 교류의 가치보다 적었다.

 

+1507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아프리카는 유라시아와 연결될 수 있었다. 그래서 아프리카 문명은 이집트, 로마, 아랍에서 온 무역인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했다. 결정적으로 아프리카는 소와 철을 유라시아로부터 받았고, 그들이 금속과 다른 상품을 생산해낸 것은 사실상 외부의 요구를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아메리카는 그러한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노동생산성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글로벌한 지식과 기술 교환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때문에 아메리카인들은 바퀴, 철, 쟁기 같은 것들을 가지지 못했다.

 

+1508

아메리카 문명이 유라시아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통해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점은 인류 공통의 생물학적 정체성이다. 즉 모든 '인종'은 똑같이 문화적 창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문명은 심각한 제한성을 갖고 있었다. 기술 수준이 석기시대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금, 은, 구리는 장식물에만 쓰였다. 농기구의 수준은 신석기 수준이었고, 생산성은 낮고 잉여 또한 적어서 아메리카 문명은 잔인한 경향을 띠었다. 성공적인 축적은 극도의 착취와 폭력의 결과였다.

 

+1509

전쟁은 마야의 신들에게 희생물로 제공할 포로를 획득하기 위한 목적도 갖고 있었다. 당시의 그림을 보면 마야의 주신 앞에서 고문당하는 희생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옥수수, 콩, 호박, 고추 그리고 뿌리식물 등을 밭에서 재배하는 집약적인 농업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야의 기술은 원시적이었다. 쟁기, 동물, 비료 없이는 늘상 토양이 고갈되는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1510

마야의 왕과 사제들은 기생적이어서, 소중한 잉여를 가져가서는 전쟁이나 피라미드 건축, 신비주의적인 종교 행사에 낭비했다.

 

+1511

스페인이 16세기 초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즈텍과 잉카제국은 산산조각이 났다. 단순히 스페인이 더 앞선 사회적 질서와 앞선 군사 기술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의 평민들은 지배자들의 패배를 환영했고 심지어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512

역사는 '순환'과 '화살'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함께 갖고 있다. 역사의 '순환'은 자연의 순환법칙을 반영한다. 자연은 출생, 성장, 죽음, 그리고 새롭게 이어지는 삶을 순환한다. 농부의 생산 사이클과 가족의 재생산 사이클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역사는 '화살'처럼 앞으로 움직인다. 혁신, 진화, 때로는 혁명이 일직선처럼 이어지며 진보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세계는 그 모습을 바꾸곤 한다.

 

+1513

고대인과 중세인 거의 대부분은 소작농-농민이었는데 이들의 생활은 역사의 순환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착취를 못 이겨 반란을 일으킬 때조차 그들은 단지 새로운 지도자를 앉혀 놓고 농장으로 되돌아갔다.

 

+1514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보면 지리적 조건은 중요하다. 물론 그것 자체가 역사를 이끄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이끄는 것은 민중의 결정과 행동이다. 그럼에도 지리적 조건은 역사가 생겨나는 토대를 제공한다. 지리적 조건은 제약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지리적 환경에 따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1515

봉건적 폭력은 모순적이었다. 전쟁은 봉건국가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전사들은 고향을 지켰고, 새 영토를 정복했고, 내부 질서를 유지했다.  한편으로 전쟁은 나름의 역동성을 갖고 있었고 봉건질서를 날려버릴 잠재력도 갖고 있었다.

봉건 체제의 잉여로 얻게 된 폭력을 밖으로 발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피의 논리는 이렇게 배태되었다. 십자군 전쟁 200년의 역사는 서양 봉건주의에 내재된 헛된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얼굴을 드러냈다.

 

+1516

살라딘은 봉건 십자군에 대항해 인민의 성정 지하드를 소집했다. 바야흐로 이슬람 세력은 선제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517

십자군 왕국들은 중동 지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힘과 공포에 의존하는 잔인한 착취자였을 뿐이다. 이슬람 통치계급이 분열하고 타락했던 시기에만 십자군 왕국들은 그곳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폭압적인 침략은 오히려 이슬람인들에게 투쟁을 위한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웠고 정체성을 확립시켜줬으며 이슬람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또한 서구 봉건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기사와 성을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만큼 엄청난 착취가 필요했다. 전사 계급의 폭력은 민중의 재산과 안전에 영구적인 위협이 됐다.

 

+1518

봉건주의의 역동성은 경쟁적으로 이뤄진 군사주의적 축적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이는 당시의 경제적 발전에는 모순이었다. 잉여를 군사에 투자한 게 아니라 토지 정리, 배수, 울타리치기-인클로저, 농업 장비 등에 투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클로저 enclosure - 말 그대로 토지의 둘레에 울타리를 친다는 뜻. 중세 유럽 때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던 토지에 울타리나 담을 둘러쳐서 사유지임을 명시했다. 모직물 산업이 융성해지자 원료인 양모가 부족해지면서 가격도 등귀하였다. 이에 지주들은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꿔 대규모로 양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던 땅에는 양을 가두기 위한 울타리가 둘러졌다. 이를 인클로서 즉, '울타리치기' 운동이라고 부른다. 인클로저 운동은 여러 번 나타났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양을 키우기 위한 16세기 목양 인클로저와 대규모 농업 경영을 위한 18세기의 농업 엔클로저다.

 

+1519

루터의 메시지가 혁명적이었던 것은, 성직자의 권한을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는 그들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라고 했다. 루터에 다르면 교회에 다니거나, 성직자에게 순종하거나, 기부금을 낸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개별적인 관계를 신실하게 맺을 때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에서 인쇄술은 핵심적 역할을 했다. 당시 중세의 책들은 라티어로 씌여졌고, 인쇄술이 도입되기 전에는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본을 만든 뒤 교회의 도서관에 보관했기 때문에 몇몇 수도원에서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책은 사상을 담고 있었고, 사상은 전복적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책이란 보통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면 안 되는 것이었다.

 

+1520

영역본 성경을 처음 책으로 발행했던 윌리엄 틴데일(1492~1536)은 초판을 독일에 가서 인쇄한 뒤 1526년 영국으로 밀반입해야만 했다. 윌리엄 틴데일은 이단이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자국어 번역본과 인쇄본을 주요 무기로 삼아 싸운 사상 전투였다.

종교개혁의 두 번째 단계는 프랑스인 장 칼뱅(1509~64)이 이끌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정착한 그는 철저한 신권정치 체제를 내세웠다. 그의 결론은 가톨릭교회와의 결별이었다. 주교들의 위계질서 전체를 거부했으며 장로들이 중심이 되는 자치교회를 옹호했다. 사실상 지역의 중산층들이 운영하는 교회를 주장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봉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지주인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이었다. 자유로운 질문과 논쟁이 폭발했다. 프로테스탄트는 무엇보다도 중산층의 종교였다. 그들은 유럽에서 가장 발달된 지역에서 자본주의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던, 산업 성장의 개척자들이었다.

 

+1521

로마에서 여섯 명의 추기경과 종교재판관이 운영한 검사성성the Holy Office이라는 이름의 종교재판소는 영구적인 반개혁적 재판소가 되었다. 재판소가 결정하면 항소할 수도 없었다. 종교재판관은 가톨릭 국가면 어디든 들어가서 이단을 체포해 고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단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으며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종교재판소는 또한 금서목록을 만들어 서적을 불태웠다. 종교재판소의 영장이 집행되는 곳에서는 미술, 과학, 사상, 탐구의 자유가 위협을 받았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 문화는 옛 전통을 기념하는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미술과 건축은 권력, 부, 신비주의를 찬양하는 바로크 문화로 바뀌었고, 과학자들은 자신의 책 때문에 화형을 당할 수 있을 정도로 사상의 자유가 위축되었다.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반종교개혁 시대의 유럽에서는 위험한 일이었다.

 

+1522

종교개혁은 구종교의 오래된 모순들을 급진적으로 혁파하려는 운동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시간이 갈수록 귀족 파벌의 싸움과 신-구교 간의 전쟁이라는 왜곡된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전쟁은 결국 타협으로 끝났다.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앙리 드 나바르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 앙리 4세(1589~1610)가 되었다. 이는 분열된 나라를 재결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교도였던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을 선언했다(1593). 

 

+1523

반종교개혁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성공적이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적어도 북부 유럽에서는 살아남았다. 북유럽 국가들이 왜 지금 세계사의 실세 국가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여기서 알 수 있다.

 

+1524

부르주아 혁명은 매우 모순된 과정이다. 부르주아지는 재산을 소유한 소수다. 부르주아지는 사회세력을 폭넓게 동원할 수 있을 때만 혁명적으로 행동해 국가를 전복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세력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사실 혁명이란 권력이 생겨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세력들의 기대와 요구는 부르주아지 혁명 지도자들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순식간에 넘어 버린다. 이러한 대중운동에는 민주적인 열망과 '수평화'하려는 열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거대 자산가들은 뿌리 깊은 두려움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혁명은 이런 이유들 때문에 좌절됐다. 1520년대, 1620년대 독일의 혁명이 좌절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두 번 다 인민들의 급진적인 개신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보수적인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바로 움츠러들었다.

대중운동의 규모와 성격은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혁명 과정 동안은 계속 위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은 충돌한다. 그 결과에 따라 혁명은 나아가거나 후퇴한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부르주아지일지라도 자신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거센 대중운동을 중지시켜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되살아나는 반혁명을 만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1660년의 왕정복고는 영국의 자산가들이 바라던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1525

자본주의는 항상 고도로 모순적이었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역동성은 우리의 능력을 놀랍도록 향상시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공급해준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때문에 세계의 부가 소수에 의해 통제됨으로써 인류 대중을 지속적인 박탈에 시달리게 한다.

 

+1526

마르크시즘은 독일 철학과 프랑스 사회주의, 영국 경제학이 종합된 것이라는 평가를 종종 받는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온전한 평가는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실천과 분리된, 단순한 이론적 문제로 다루는 이런 관점은 마르크시즘의 핵심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1527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철학과 사회, 경제학에 관한 현대적인 개념들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직접 겪은 구체적인 경험의 토대 위에서 그 개념들을 변용했다. 바로 이 때문에 마르크시즘을 '관념론idealism'-경험에 토대를 두지 않아 실천 속에서는 결코 옳고 그름을 확인할 수 없는 이론을 위한 이론-과 반대되는 의미에서 '유물론materialis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528

헤겔 변증법은 '만물은 자기 안에서 모순적이다', '모순은 모든 운동과 생명의 뿌리에 있으며, 만물은 자기 안에 모순을 품고 있을 때에만 움직이고 충동과 활기를 갖는다'라는 두 가지 개념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헤겔 변증법은 관념적이었다.

 

+1529

마르크스는 이 같은 관념론적인 변증법을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바꿈으로써 '헤겔을 물구나무 세웠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아주 간단했다. 주요한 모순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들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를 추동하는 것은 실재하는 사회적 세력 간의 충돌(모순)이다.

 

+1530

리카도는 자본주의의 본성에 관해 두 가지 혁신적인 발견을 했다. 하나는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상대적인 양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본'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가치가 올라가면 이윤은 하락한다'는 것이었다. 즉 노동에게 이익인 것은 자본에게는 손실이고, 반대로 자본의 이익은 노동의 손실이다. 임금과 이윤은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이다.

 

+1531

공산주의자들이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면 소수가 비밀스러운 지하운동을 통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면 대중도 자발적으로 전면 봉기에 나설 것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착취와 빈곤에 대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적대감에 공감했다. 유토피아주의자들처럼 더 나은 세계를 상상했고, 공산주의자들처럼 혁명적인 행동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유토피아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모두에게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순진하게도 부유한 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내놓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군대와 경찰, 감옥을 보유한 국가를 은밀한 쿠데타를 통해 뒤집을 수 있다는 공상에 빠져 있었다.

 

+1532

1789년의 교훈과 1848년의 경험, 그리고 맨체스터의 노동계급에 대한 엥겔스의 연구는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즉,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었다.

그 수수께끼란 이런 것이었다. 역사를 통해 인간의 노동생산성이 서서히 증가해 왔다는 것은 결핍을 없앨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점점 커져왔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백만 명이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데 반해 소수의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많은 부를 누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불합리한 상황이 가능했을까? 역사의 수수께끼는 바로 이것이다.

 

+1533

오래된 생산방식을 바꾸지 않은 채 보존하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모든 계급이 존재하는 첫째 조건이었다. 생산의 부단한 변혁, 모든 사회적 조건의 쉼 없는 변동, 불안전성과 동요의 지속은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시대를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하는 특징이다. 고착되고 꽁꽁 얼어붙은 모든 관계들은 오래되어 숭고해진 편견이나 상식들과 함께 모두 쓸려 나가고, 새로이 형성된 것들은 미처 골격을 갖추기도 전에 낡은 것이 돼버린다. 견고한 모든 것들이 공기 속으로 녹아들어간다... -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중

 

+1534

모든 자본가들은 경쟁의 압박을 받아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늘리고,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성공의 척도는 이윤에 있었다. 경쟁에서 이긴 자본가는 시장에서 점유율을 더 높일 수 있었고 이윤도 더 많이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남긴 이윤은 경쟁력을 더 높이기 위해 다시 투자되어야 했다.

 

+1535

자본주의화 과정의 가장 원초적인 재료는 물론 노동력이다. 노동력은 이제 본질적으로 상품이 되었다. 또한 노동력은 그것이 갖고 있는 실제 가치 이하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게 일상화되었다. 둘 사이의 차이 즉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구입하는 상품의 가치 사이의 차이가 이윤의 본질이다.

이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설명한 인물이 마르크스다. 그는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실제로 행해진 일의 양-가 아니라, 노동력-일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대가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리카도의 '노동가치설'에 기여했다.

노동에 대한 대가와 노동력에 대한 대가의 차이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비밀이다. 임금이 노동에 대한 대가라면,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가치에 대한 정당한 지불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임금이 노동력에 대한 대가인 경우, 임금은 시장의 거래가격에 따라 결정되고, 자본가들은 이윤을 얻기 위해 임금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라고 노동자에게 요구하게 된다.

 

+1536

중세 농업은 노지Open Field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두세 개의 대규모 농지를 여러 부분으로 나눠 각각을 농민 가족들에게 할당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나눠진 토지에는 울타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농사 일이 마을 공동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농민 가족들은 숲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각자 필요한 땔감을 대거나 사냥을 할 수 있었고 소나 양을 방목할 수 있도록 목초지도 마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인클로저는 소수의 부농들에게 토지에 울타리를 칠 권리를 주었고, 그렇게 울타리를 친 땅을 사유지로 취급해 다른 농민들의 접근을 막았다. 따라서 인클로저는 농민들로부터의 토지 탈취를 의미했다. 이 때문에 인클로저는 수 세기에 걸쳐 영국 시골에서 격렬한 계급전쟁을 초래했다. 당시 시에 그 때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공유지에서 거위를 훔쳤다며

사내는 목을 매달고

아낙은 매를 때린다네

하지만 거위한테서 공유지를 빼앗은

더 큰 도적은 보고도 못 본체 하네

 

+1537

일거리를 잃은 방직 장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벼랑 끝에 몰린 그들은 필사적으로 후방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 불확실하지만, 전설적인 이름으로 남아있는 네드 러드 장군의 지휘 아래 비밀리에 조직을 만들어 기계파괴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러다이트 Luddite라 불린 이 파괴운동은 국가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만다. 1812년 영국 요크에서 행해진 공개재판에서 주동자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당했다. 결국 방직 장인들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일자리를 찾아 급속히 커져가고 있던 도시로 몰려가야만 했다.

 

+1538

1845년과 1852년 사이에 아일랜드 농민의 주요 작물이었던 감자 농사가 병충해로 흉작을 맞고 말았다. 하지만 지주들은 이윤을 위해 얼마 수확하지도 못한 감자를 수출했고, 그 결과 약 1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고, 기근을 피해 약 100만 명이 나라를 떠났다. 이 시기 동안 전체 인구의 약 25%가 감소했다. 

맨체스터, 글래스고를 비롯해 10여 개에 이르는 북부 산업도시들에 몰려든 프롤레타리아는 대부분이 잉글랜드의 인클로저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클리어런시스Hightland Clearances(스코틀랜드 고지대의 강제이주), 아일랜드의 기근을 피해서 왔거나, 가난에 빠진 방직 장인과 다른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온 것이었다. 한마디의 도시의 노동계급은 굶주림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고 불렀던 현상은,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강제적으로 추방하고, 장인들한테서 생산수단 통제권을 빼앗는 것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에 관한 역사는 피와 불이라는 문자를 통해 인류의 연대기에 기록돼 있다'고 썼다. 

지난 250년간 국제자본주의가 작동해 온 방신은 더 많은 농민과 장인들의 공동체가 생산수단을 빼앗기고 빈곤에 몰려 결국 임금노동자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오늘날에도 중국과 인도, 브라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과정은 현존하는 노동계급에게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낡은 산업은 지고, 새로운 산업이 떠오른다. 오늘날 글래스고의 콜센터 노동자수는 1세기 전의 공장 노동자들만큼이나 많다.

 

+1539

1800년부터 1875년 사이에 상업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로 탈바꿈했다.

 

+1540

세계 자본주의 시장은 인간의 노동으로 생겨난 것이었지만, 이제는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닌 거대한 메커니즘이 되었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인류의 모든 행위를 지배하게 되었다.

 

+1541

1차 세계대전은 국가자본주의 진영 간의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목표는 하나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지배계급을 누르고 전세계의 자원과 권력을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희생자일 뿐 전쟁에서 이겨도 얻을 게 없었다. 그들은 대학살, 파괴, 궁핍을 견디며 잃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꾸준히 성장 중이던 반전주의 소수집단이 강력한 선동을 시작했다. 그 바람에 전쟁 발발로 중단됐던 대규모 투쟁이 조금씩 재개되었다. 향후 이 투쟁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노동자 혁명으로 발전했다. 투쟁이 시작되자 동부전선의 전투가 중단됐고, 이어 서부전선의 전투 역시 멈췄다. 위력을 더해가던 투쟁의 힘은 결국 유럽 자본주의의 존손을 위협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1542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대학살 중 하나였던 1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유럽의 수백만 노동자, 군인, 해군, 농민들의 혁명 활동에 의해 종결되었다.

 

+1543

"유럽 전체가 혁명의 정신으로 가득 찼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919년 프랑스 총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기존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질서에 대해 유럽 전역의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544

1945년 8월 6일 미국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는 '리틀 보이'라는 별명을 붙인 원자 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폭발 첫날 적어도 4만 5000명이 죽고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이후 상해와 질병으로 천천히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사흘 후 또 다른 폭탄 '팻멘fat men'을 나가사키에 떨어뜨렸다. 투하 당일 최소 3만 명이 죽었고 비슷한 수가 이후에 또 죽었다.

두 도시 모두 군사적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전쟁도 거의 끝난 상황이었다. 그 무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과시하기만 했어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새로 발굴한 무기를 선보이고 싶었고 그것을 통해 전 세계적인 지배력을 선언하고 싶어 했다.

 

+1545

'상호확증파괴MAD전략-적국의 핵무기 선제공격을 단념시키기 위한 것으로, 적이 핵공격을 가할 경우 남아 있는 핵전력으로 상대편을 전멸시킨다는 보복전략-이란 용어는 두 제국주의 진영 사이의 공격 균형을 일컫는 말이다. 각각이 보유한 핵무기가 전면적인 전쟁을 억지하는 역할을 했다. 

+1546

자국의 체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종종 반대편의 제국주의 세력과 동질감을 느끼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동유럽에서는 반스탈린주의자들이 서구의 자본주의식 민주주의를 이상화했다. 서유럽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를 계속 사회주의의 모국으로 여기고 있었다. 

 

+1547

청년문화도 새로 생겨났다. 처음으로 젊은 사람들이 충분히 독립적인 삶, 수입, 일로부터의 자유를 10대 때부터 얻었고 그들 나름의 패션, 음악, 정체성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48

유럽 국가들의 힘은 세계를 양분한 미국-소련 초강대국에 의해 가려졌다. 뿐만 아니라 유럽은 재정적으로도 무너진 자국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1549

실업은 자본주의 경제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예비군the reserve army of labour'은 실업에 대한 두려움을 악용해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써 노동력의 가격을 낮춘다. 하지만 대호황은 사실상 전 세대가 완전히 고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력 공급은 부족했고, 고용주들은 직원을 갖기 위해 경쟁했고, 실업에 대한 두려움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노조기구를 결성하여 유리한 조건을 요구하였다.

또한 정부들은 국민들로부터 구입 가능한 가격의 집, 신식 병원, 더 나은 학교, 그리고 개선된 복지 공급책을 제시해달라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회적 임금'이 개인 임금과 함께 인상되었다. 일례로 영국에서는 노동자층이 차지하는 국가 전체 부의 비율이 대호황 동안에 국내총생산GDP의 약 절반에서 3분의 2로 상승했다. 임금 인상과 정부 지출 확대는 수요를 창출하였고 호황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는 자본가들에게 비용 상승, 경쟁력 감소, 이윤 감소로 다가왔다. 특히 노동운동이 강세인 지역에서는 문제가 되었다. 예컨대 영국 자본가들은 서독과 일본의 자본가에 비해 경쟁력이 낮아졌다.

세 번째 문제는 장기간 지속되어 왔던 자본의 중앙집중화 경향 즉, 세계경제가 갈수록 소수의 거대기업에게 지배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호황 동안 다국적기업의 등장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곧 국가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난 경제세력의 등장을 의미하였다.

 

+1550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호황은 끝이 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국가 자본주의는 위기와 갈등 속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를 대체하며 등장한 것이 세계화된 기업들의 '신자유주의'였다.

 

+1551

신자유주의(이전에는 통화주의monetarism, 또는 대처리즘Thatcherism으로 불렀다)는 때로는 이데올로기적인 착오 정도로 치부되곤 했다. 하지만 이는 심각한 오해다.

 

+1552

신자유주의는 지배계급의 자기 합리화 이념이라고 해도 좋다.

 

+1553

1970년대 들어 상황은 달라졌다. 국가자본주의의 모순이 축적되면서 대호황을 끝내 버리고 세계를 장기적인 경기 후퇴로 몰아넣는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위기에 대한 반응이다. 간단히 말해 신자유주의는 글로벌한 부유층 대 나머지 계급 간의 전쟁이다. 그 목적은 1945년 이래 노동자들이 획득해온 것들을 무너뜨리고, 착취와 이윤의 비율을 늘려 노동자에게서 자본가에게로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다.

 

+1554

영국 광부들의 패배는 전세계적인 의미가 있었다. 노동자계급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배계급이 분쇄해버린,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1555

국영 기업과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효과는 체계적인 공무원 조직의 교섭단위를 무너뜨렸고, 기업주들이 민영화된 사업의 사업권과 계약을 따내기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1556

민영자본은 국가자본을 대체해 공공서비스의 주 공급자가 된다. 국가는 세수를 주택, 병원, 학교, 복지 등 사회적 임금의 형태로 환원하는 대신, 기업에게 돈을 지불하고 이들을 공공서비스의 공급자로 만든다.

 

+1557

예를 들어 영국 정부는 현재 국가보건의료제도를 민영화하고 있다. 보건 예산은 연 1조 250억짜리다. 한줌의 민영기업들이 곧 영국 전체의 보건 의료서비스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1558

1989년의 혁명은 대중운동의 눈부신 승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제한적이었다. 모스크바, 베를린, 부다페스트, 바르샤바, 소피아, 프라하, 부큐레슈티의 군중들은 자유와 번영을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 자유와 번영을 누리지 못했다 정부 관료들은 의회 정치인들로 탈바꿈했다. 국가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로 탈바꿈했다.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버려졌고 서유럽식 '자유'는 결국 환영일 뿐이었다.

 

+1559

전례 없는 액수의 국가자본을 민영은행에 쏟아 붓자 세계 금융체계는 안정되었다. 이 자본은 시급한 손실을 메웠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정부가 주요 은행이 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금융자본가들의 '신용'을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수익은 사유의 것이, 손실은 공공의 것이 된 셈이다.

 

+1560

신용 경색, 신용 붕괴, 불황 위기는 모두 1970년대에 기원을 둔다.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은 낮은 수익과 부진한 성장에 맞서 노조, 임금, 복지국가에 정면타격으로 대응했다. 목적은 부를 노동에서 자본으로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높은 수익이 사업, 투자, 성장을 촉진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양날의 검이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기업에는 낮은 임금을 주길 원하면서 다른 기업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아 자신들이 생산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해 주기를 원했다. 1979~2007년의 신자유주의 경제는 소득 불평등과 수요 부족이 늘어나면서 선로를 이탈할 위기에 놓였었다.

연 평균 성장률은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2차 대전 당신 무기 생산이라는 자극제는 미국의 성장률을 5.9퍼센트로 올려놓았다. 1960년대 대호황이 한창일 때는 4.4퍼센트를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3.1퍼센트로 떨어졌다. 2000년대에는 2.6퍼센트였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60년대 성장의 대부분은 실제 사용될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실물경제의 성장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기록된 성장은 부채를 마구 늘려 줄어든 수요를 '해결'하려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진짜 성장이 아니었다.

가공적인 수요는 경제의 '금융화'로 생성된 것들이다. 시장 규제 완화, 낮은 이율(저리 자금), 금융 '개혁', 늘어가는 가계부채는 결국 역사상 가장 큰 거품을 만들어냈다. 경제는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는 대출로 넘쳐났다. 수요는 잔뜩 증가했고, 가격은 상승했으며, 여기서 폭리를 얻으려는 자들이 덤벼들었다. 그러면서 가짜 부의 거대한 거품이 생겨났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사람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돈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561

화려해 보이는 신자유주의 이면에는 영구적인 '부채 경제'라는 현실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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