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Reading

사생활의 천재들

[밑줄]

 

+1424

우리를 잡았다

우리를 감옥에 넣었다

나를 벽 안으로

너를 벽 밖으로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가장 나쁜 것은

알면서, 모르면서

자기 안에 감옥을 품고 사는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들이.

- <파라예를 위한 저녁 9시에서 10시의 시 : 1945년 9월 26일>, 나짐 히크멧. 이난아 옮김.

 

+1425

씨앗에서 어떻게 과일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서 말테의 입을 통해서 던진 질문이기도 했던 걸로 기억나. 낯선 세상에 던져진 자의 당혹감 어린 시선으로 말테도 나처럼 궁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어떻게 인간이 자라날 수 있을까?를 말이야.

 

+1426

네 책에서는 고독한 두 사람이 만나면 저항군이 되더구나. 이것은 카뮈의 말과도 같아. 고독한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 반항이라고. 난 고독한 두 사람이 만나 적응을 말하기보다 저항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미래를 가져다주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이건 사랑과도 같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안전하게 지켜주겠다는 약속, 너를 위해 싸우겠다는 약속. 사랑 안에 이런 맘이 들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지.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지? 무엇을 위해 싸우지? 무엇을 보호하지? 무엇에 분노하지? 뭐라고 표현했든 나는 네가 네 책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해.

 

+1427

인간에게 어떤 미래가 있다면 그건 우리가 다시 시작하길 포기하지 않아서야.

 

+1428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야. 우린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사랑을 나누고 슬픔을 달래고 용기를 내고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갈등을 풀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어느 선에선가 타협을 하고 돈을 벌고 일을 하러 가야 하고 가족들을 먹여야 해.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거지. 단 희망을 이 사이에 깨문 현실주의자.

 

+1429

한 알의 소금이 대양에 흘러들어 가는 것 같은. 우리 같은 사람도 이 사회의 한 모퉁잉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나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다. 사생활이란 카프카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일상들을 말한다. 이들은 그런 사생활에서 천재다. 사생활을 보여주는 데서 천재들이 아니라 사생활을 살아내는 데서 천재들이다. 그들은 진부하고 시시하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데서 천재다. 그들은 자기 삶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 삶의 문제를 직면하는 데, 그것을 푸는 데, 그것에서 보편성을 보는 데 천재적이다. 즉 그들은 삶의 태도에서 천재다.

 

+1430

그들은 자기 내면에 내일의 사과나무를 심는 데 천재다. 그들의 나무는 그들 내면에서 자란다. 

그들은 자기에게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 천재적이다. 그들은 기억력의 천재들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을 기억하는 데서 천재들이다. 그들은 혁명가는 아니지만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진짜 혁명적인 것은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니까.

 

+1431

그들은 다시 시작함에서 천재다 누군가는 말했다. 회복기 환자처럼 살고 싶다고. 그들은 나를 회복기 환자 혹은 재활훈련을 받는 환자로 만든다. 치통을 앓는 자가 치통을 치료하기 위해서 이 닦는 법을 새로 배우는 것처럼, 위장병을 앓는 자가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식습관을 바꾸는 것처럼, 우리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다시 배우고 익히고 습관을 고쳐야 한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줘보는 것이다.

 

+1432

그들은 하나뿐인 자신의 무기가 뭔지 알고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무한히 활용한다.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한번 살아보기 위해서. 그들은 먼 미래에 자신에게 주어질 최대 행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여기의 생활 속에서 충만해지는 최소 행복을 생각한다. 우리는 (아직 존재해본 적 없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처럼 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기 위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쓴다. 

 

+1433

쿤데라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그 리듬을 듣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매순간 삶의 시간이 끝없이 계산되고 있다는 것을 환기해주고 있으니까.

 

+1434

인간은 정말 신기한 존재다. 인간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이상하게 매번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낸다.

 

+1435

[박수용의 사생활]

내가 진학한 학교는 지금은 아주 유명해진 거창고등학교였습니다. 그 학교에서 이런 것들을 배웠습니다. 세 번 죽을 각오를 해라. 즉 얼어 죽을 각오를 해라. 굶어 죽을 각오를 해라. 감옥에 갈 각오를 해라. 빛과 소금이 되어라. 누구나 원하고 서로 하려고 하는 것은 피해라. 너도 나도 원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소하게라도 이득이 있는 것이다. 그걸 피해라. 그뒤로 나는 줄곧 내가 아니어도 남들이 모두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피해왔습니다.

 

+1436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437

카프카는 지혜로운 자들의 세계는 항상 우화일 뿐 일상에는 쓸모가 없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투덜댔습니다. 앞에서 한 말을 다시 반복합니다. "일상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인데 말이야." 

 

+1438

우리에게도 늘 어떤 식으로든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낮의 길과 밤의 길. 세상이 살라는 길과 내가 살고 싶은 길, 우리 마음도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혼자이고 싶은 것과 함께이고 싶은 것. 용감해지고 싶은 것과 편안해지고 싶은 것. 싸우고 싶은 것과 고요해지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은 것과 초연해지고 싶은 것. 뜨겁고 싶은 것과 서늘하게 마음을 비우고 싶은 것. 속하고 싶음과 벗어나고 싶음. 떳떳하고 싶음과 포기하고 싶음. 자부심과 자기 비하.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

 

+1439

체호프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꾸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이 넘어지는 건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불행하고 다른 이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형제나 가까운 지인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있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나보코프

 

+1440

제게는 그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좀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약속 같습니다. 그가 그가 된 것은 한결같이 하늘의 별과 호랑이를 보았기 때문이듯이, 그가 고통을 겪은 것 역시 별과 호랑이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1441

우리는 현실 때문에 비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서 버텨야 할지 모를 때 비참해집니다.

 

+1442

나를 땅에 묶어 놓으려 하지 마십시오. 위대한 수수께끼는 당신의 허리춤이나 커다란 눈 속에 있지 않습니다. (...) 저기 하늘의 별들 위에는 나를 잡아당기는 청상의 자석이 있습니다. 그 자석은 커다란 향수와 엄청난 동경 덕분에 그 장력을 유지합니다. 별들 위에 있는 천상의 누군가가 나를 잡아당깁니다. 나를 땅에 묶어 놓으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사랑보다 높고 인생의 즐거움보다 고귀합니다. - <향연 외>, <뱀과 백합>, 카잔차키스.

 

+1443

그래요. 긴 호흡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실패도 성공도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날은 항상 숲으로 이어지는 길의 입구 같습니다. 긴 호흡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결코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틀렸다고만 합니다. 하는 만큼 알 수 있다는 말도 우리에겐 희망입니다. 하는 만큼 보입니다. 그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면 되니까요.

 

+1444

<변영주의 사생활>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저는 지혜로워지고 싶었습니다. '내가 지혜롭지 못해서 남들을 괴롭히는구나.' 그때부터 남의 말을 듣는 게 중요해졌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저는 자신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그건 가장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벌이었습니다. 책 읽고, 영화 보고, 미드 보고, 음악 듣고, 죽어라 뭔가를 보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지냈습니다. 어떤 날은 나에 관한 글을 써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나에게 상을 주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즐거워졌습니다.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볼까? 오늘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아볼까? 그 시간은 정말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부턴 빨리 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잘하는 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1445

듣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싫어요."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당신을 더 잘 알게 되나요?란 질문이 가능함을. 그리고 그 질문의 힘을.

 

+1446

피카소는 숲에서 초록색을 실컷 봐서 초록이 눈에 넘쳐 흘러서 초록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고 했던가요? 저도 언젠가는 그날이 오길 벌써 몇 년째 기다립니다.

 

+1447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진심 어린 갈망 중 하나는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불을 켤 때, 밤에 눈을 감을 때,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는 내일은 좀 달라지길 꿈꿔보는 것입니다.

 

+1448

그 시절에 저는 어떤 학자에 관한 천진난만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백살은 살아야 한다고. 그 이유? 적어도 백 년은 배워야 하기 때문에.

 

+1449

<윤태호의 사생활>

막연하게 아주 막연하게. '진짜 나는 지지 않을 거야. 나는 순수 미술 공부도 오래했다. 나는 더 잘 그릴 거야.' 왜 그렇게 끝없는 주문이 필요했던 걸까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것마저 무너지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내게 있는 단 하나의 재능은 그전이나 그때나 그림 그리는 것 하나뿐이었던 겁니다.

 

+1450

그런데 이 이야기가 혹시 '온갖 역경을 불굴의 의지로 뚫고 마침내 성공했다'로 들리는가요? 제 귀엔 그 반대로 들립니다. '온갖 어려움을 많은 도움을 받고 간신히 뚫고 나왔으며 아직도 두려움과 불안으로 떨린다'로.

 

+1451

우리는 사실상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힘센 타인이 나를 마음대로 하는 한도 안에서만 우리는 유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는 매일매일 묶여서 반복적인 일을 하는 시지프스이면서 동시에 반항하는 인간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452

이 거대한 세계는... 우리가 자신을 알기 위하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 거울이다. 요컨대 나는 세계가 나의 교과서가 되기를 바란다. - <몽테뉴의 숲을 거닐다>, 박홍규.

 

+1453

<김산하의 사생활>

자기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거나 자기 것을 갖고 있지 않아야 딴 걸 볼 수 있습니다. 생물은 매일매일 인풋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잘 먹는 사람도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먹고 일주일 동안 뱃속에 저장한 것으로만 살 수는 없습니다. 생물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란 게 있습니다. 들어가고 나오고 또 채워지고 비워지고 정체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이디어의 원천인 셈이고, 이 흐름이 표현의 의지를 키우고 생명력이 됩니다.

 

+1454

사랑하는 것과 마니아가 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한다면 전문가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에는 사랑하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사랑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경쟁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니아는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동차 마니아, 레고 마니아, 온갖 마니아들이 있는데 마니아들은 자기 관심 방면에 있어서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저는 전문가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1455

저에겐 항상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었습니다. 계획을 인조적으로 만들어간다, 이것이야말로 나답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OO이 될 것이다, 나는 '언젠가 OO이 되기 위해서'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미래완료형 때문에 희생을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456

제겐 제 자신을 키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저에게 과제를 부여하는 겁니다. 어떤 과제냐면 하나의 동물을 관찰하듯 자기를 관찰한다는 겁니다. 우리들이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다른 생명체가 그러하듯 우리 인간에게도 자기에게 맞는 해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해법을 찾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의 원래 관심사에 집중해보는 것입니다.

 

+1457

저에겐 삶의 디테일이 중요합니다. 왜 디테일이냐고요?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는 결국 디테일로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정책 결정권자도 아니고, 우리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삶의 디테일뿐입니다.

 

+1458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자가 입구에서 맞닥뜨리는 구절입니다.

비통의 도시로 가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영원한 고통을 당하려는 자 나를 거쳐서 가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저는 처음에 이 구절을 읽었을 때는 지옥은 희망이 없는 곳, 절망한 가득한 곳이란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다음에 읽었을 때는 희망을 버리면 이 세상도 지옥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다시 읽었을 때는 '나'가 정말 '나'로 읽혔습니다. 나를 거쳐 가는 자가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면, 나를 거쳐 가는 자가 모든 희망을 버리게 된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지옥인 것입니다. 내가 타인의 지옥인 것입니다.

 

+1459

욕망은 (...)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 한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 <사랑에 관한 연구>, 오르테가 이 가세트.

 

+1460

<조성주의 사생활>

파브르에겐 꿈이 하나 있었어요. 그는 어느 날 한숨을 쉬면서 말했어요. "아, 천 겹 파리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다른 눈으로 세상을 한 번 보는 것, 그건 이루기 아주아주 어려운 꿈인 거지요. 우린 우리라는 감옥을 벗어나기가 어려워요. 하늘이 아무리 깊고 광활해도 우리는 우리에게 허용된 하늘밖에 못 볼지도 몰라요. 그 생각을 하면 조금 슬퍼져요.

 

+1461

저는 순정만화를 좋아했지만 굳이 순정만화가 아니라도 모르는 신간이 없을 정도로 빠져들었습니다. 빠져들었다는 말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빠져들었지만 진짜 빠져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맘속으로는 늘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언제나 제 뒤를 기분 나쁘게 따라다니다가 불쑥불쑥 찾아왔습니다.

 

+1462

미루기 때문에 우리는 중년이 되어도 아픕니다. 노년이 되어도 아픕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란 책에서 '미루기'는 이제 더 이상 게으름, 나태, 침묵, 권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적극적 자세, 잇달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통제권을 취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463

그 어느 시대보다 자기주장을 할 수많은 권리와 수단을 갖고 있는데도 그 권리로 자기 처지와 삶을 개선하지는 못하는 시대, 그 어느 시대보다 수많은 재능을 갖게 되었지만 그 재능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린 아픕니다. 우린 사랑과 도움을 청하는 아픈 사람들입니다. 두려움에 떨며 공격적이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겐 경쟁력이란 말이 헌신이나 우정 같은 말보다 훨씬 더 익숙합니다. 우리에겐 타인에 대한 인정과 존중보다 비교라는 말이 더 익숙합니다.

 

+1464

<엄기호의 사생활>

하지만 소년 소녀가 자라 청년이 되면서 무슨 일을 겪는 걸까요? 그들은 가슴속에 상실의 씨앗을 키웁니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이 그들에게 가장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상실을 공유합니다. 상실에 대한 공통의 감각, 그건 아마 그들이 가져왔던 꿈이 그 야릇함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점점 더 현실적인 모습을 띠기 시작한 어느 날 밤,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자!"라고 말하는 그 밤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상한 점은 다들 똑같이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야지!"

 

+1465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우린 스캔들이나 불명예를 피하고 불편한, 피곤한, 불쌍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혹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안전한 말만 합니다. 쓸쓸한 사랑, 어긋한 결혼, 무능한 사람이란 느낌, 필요 없는 사람이란 느낌, 모욕감과 억울함. 이런 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털어놓아야 할지 모릅니다. 진심은 상담실에서나 털어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시대는 심리 상담이 대유행인 시대로 이미 기록되고 있습니다. 스페인어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네가 누구인지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달려있지 않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지에 달려있다."

 

+1466

<홍기빈의 사생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을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아라'라는 정해진 매뉴얼과 같은 규칙 혹은 청사진이 아니다. 살아가며 이런저런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그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원래 만들고자 했던 미래는 어떤 것이었고 내가 소중히 하려 했던 것, 내가 반드시 피하려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일깨워주고 또 내가 생각했던 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느슨한 행동 지침이다. -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홍기빈.

 

+1467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보면 조지 오웰이 극빈자가 되어서 도시를 돌아다니는데 그때 자신이 경험한 가난은 '지루함'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이라 해봤자 배고픔을 참는 것, 어디 먹을 것이 떨어져 있지 않는 찾는 것뿐이니 지루하다는 겁니다. 그전에 저는 자유와 안정성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유를 잃으면 대신 안정은 되고, 안정성을 잃으면 대신 자유를 얻고. 그러니까 자유는 불안정성과 세트. 안정성은 지루함과 세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한 자유는 불안하면서도 지루한 것이었습니다.

 

+1468

안전하게 합리적인 계산이나 하면서 익히 알려진 행동들만 하다가 죽을 거라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애초에 우리가 뭐 하라 태어난 것일까요?

 

+1469

잠정적 유토피아란 말은, 비그포르스란 사람이 스웨덴에서 192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서 투쟁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이 사회를 더 낫게 만들려는 사람이면 궁극적 유토피아를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토마스 모어, 마르크스가 꿈꾸는 공산주의 사회 같은 아주 황홀한 유토피아, 이런 생각부터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낙원은 인류 역사 최초에도 없었고 끝날 때까지 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건설하려는 세상은 백 년 후, 오백 년 후에도 올까 말까 한 그런 세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 세상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이고, 그게 의미 있는 유토피아, 잠정적 유토피아란 겁니다.

 

+1470

<정병호의 사생활>

그의 지론은 다른 모든 위대한 이론들처럼 단순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아는 만큼 보이고 계속 계속 더 보려 할수록 더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1471

노래를 가장 잘 부르거나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 가장 아름다운 사람, 가장 힘이 센 사람, 가장 솜씨가 좋은 사람,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은 가장 존경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불평등과 악덕으로 향한 첫걸음이 되었다. 이러한 최초의 선호로부터 한편으로는 허영심과 경멸이 다른 한편으로는 수치심과 선망이 유래했는데, 그 새로운 누룩곰팡이에 의한 발효는 마침내 행복과 순수에 치명적인 화합물을 발생시켰다. - <인간 불평등 기원론>, 루소.

 

+1472

불평등한 재능으로 서로서로를 판단하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오로지 우리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타인의 평가에 의해서만 자신이 존재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 Read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 잘 쓰는 법, 그딴 건 없지만  (0) 2022.01.22
좌파세계사  (0) 2022.01.17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0) 2021.09.12
게임인류  (0) 2021.08.07
이야기의 탄생  (0) 2021.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