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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명언

서양고전을 관통하는 21개의 핵심 사유

[밑줄]

+2264

'온전',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누가복음, 6장 22절)에서 '성하면'으로 번역되었다. 즉 눈의 '초점이 맞으면' 제대로 빛을 볼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여러 겹의 이미지들을 갖고 있다. 그런데 초점을 잃으면 그 이미지들은 제각기 따로 보일 테고, 그 결과 우리는 그 여러 이미지들을 좇다 인생은 더욱더 복잡하게 꼬인다.

 

+2265

야속한 상대방이 15분만 확보해 줬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을 지는 몰라도 분명 감격스러웠을 것이고, 또 그 여운은 남은 생을 버티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호라티우수(Quintus Horatius Flaccus, BC 65-8)의 명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시간을 지키지 못한 우리의 후회에 거듭된 다짐으로 위로를 주곤 한다.

 

+2266

호라티우스의 시 <송가> 1권 11장에 나오는데, 많은 경우 이 명언은 "오늘을 즐겨라."(내일은 없나니.)는 식으로 이해되지만 전후 문맥을 되새기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카르페(Carpe)'는 '(열매나 꽃을)따다', '(곡식을)거두다'라는 동사의 명령형이고 '디엠(diem)'은 '날(day)', '24시간', '특정 시간'이라는 뜻의 목적어다. 그러면 이 명언의 의미는 '날을 거두라', '시간을 수확하라'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말이 등장하는 맥락을 살펴보자.

그대 맛보길, 포도주 걸러내어, 기회는 순식간

sapias, vina liques et spatio brevi

큰 기대일랑 가지치고. 내 말하는 동안도 시샘하며 도망하네,

spem longam reseces. dum loquimur, fugerit invida

내 한철은, 오늘을 거둬들이게, 이후 신뢰하기 어려우니.

aetas;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2267

요약컨대, 호라티우스가 그토록 '한철'에 집착하는 이유는 늙음과 죽음이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한철을 잘 거둬들이는 것은 시듦과 사라짐에 대한 반항이며 몸부림이다.

 

+2268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카르페 디엠>을 소개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그는 학생들에게 영국 시인 로버트 헤릭(Robert Herrick, 1591-1674)의 시 <처녀들에게>를 읊조리며 "할 수 있을 때 장미꽃 봉오리를 모으라."는 말이 '카르페 디엠'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키팅은 "왜 시인은 할 수 있을 때 장미꽃 봉오리를 모으라고 했을까? 그것은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이지."라고 말한다. 도망치듯 사라지면서 죽음으로 치닫는 세월 속에서 장미꽃 봉오리를 모을 수 있는 한철을 붙잡으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2269

희랍 철학자들을 연구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180-240)가 전하는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도시국가 아테네가 인정하지 않는 "다른 새로운 신(령)들을 들여온 죄"였다. 그 신(령)을 희랍어로 '다이몬'이라 하는데, 영어 단어 '데몬(demon)'의 뿌리어이긴 하지만 고대 희랍, 특히 호메로스 서사시에서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고 단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신', 그러니까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신'을 말할 때 사용된다.

 

+2270

작품명 <다나이드>는 희랍어 '다나이데스'로 '다나오스의 딸들'이라는 뜻이지만, 이 작품에는 단 한 명의 여인만 있다. 비극적이면서도 육감적인 조각상의 실제 모델은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다. 그 클로델을 통해 다나오스 딸들의 비극이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이 딸들은 왜 이토록 비극적일까? 신화에 따르면, 다나오스의 딸들은 지하 세계, 하데스로 내려가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긴 명언 "밑 빠진 독"은 이후 많은 사람들의 여러 버전으로 회자된다. 그중에서 특히 플라톤은 이 명언을 인간 욕망의 문제와 연결시켰다. 플라톤이 '밑 빠진 독'을 언급하는 책은 대화편 <고르기아스>다. 다음을 보자.

"일전에 나는 어떤 현자로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네. 즉 지금 우리가 죽어 있는 것이고, 육체는 우리 영혼의 무덤이다. 욕망이 영혼의 이 부분에 들어 있는데, 이 부분은 설득당하여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기 십상이지. (...) 어떤 재치 있는 이야기 작가는 ... 이부분을 항아리라 불렀다네. 생각 없는 자들의 이 부분, 그러니까 영혼의 이 부분에 욕망이 들어 있는데, 이 작가는 새어 나가는, 즉 절제하지 못하는 이 부분을 '밑 빠진 독'이라고 했네.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표현한 것이네." - 플라톤, <고르기아스> (493a-493b)에서

 

+2271

"이들은 밑 빠진 독에다 그처럼 밑 빠진 것, 즉 체로 물을 나른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체는... 영혼을 뜻한다네. 생각 없는 자들의 영혼은 밑 빠진 것과 마찬가지라서 체에 비유한 것이지. 그러니까 그들의 영혼은 지조가 없고 망각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전혀 유지할 수 없다네." - 플라톤, <고르기아스>(493b-493c)에서

 

+2272

열정은 희랍어 에로스인데, 플라통은 <향연>(203c)에서 그 출생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즉 "에로스는 포로스(풍요의 신)과 페니아(빈곤의 여신) 사이의 아들"이라는 신화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에로스, 즉 열정은 결핍에서 풍족으로 향하는 마음의 상태다.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결핍이 욕망을 자극한다.

 

+2273

우리는 지금 무엇이 부족한다? 분명 그 결핍을 채우려 우리는 저마다 무엇인가를 욕망할 것이다. 정말 열심히 그것을 욕망하던 어느 날, 느닷없이 드디어 그것을 얻게 된다. 그런데 기쁨과 만족도 잠시,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욕망한다. 

 

+2274

카이사르가 여기까지 온 것은 그의 결단, 즉 루비콘 강에서 외친 "주사위는 던져졌다.(iacta alea est.)"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기거나 결정되었을 때 이 명언을 쓰곤 한다.

 

+2275

기원전 49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는 다시 독재관에 버금가는 전권을 맡겼고, 한편 카이사르에게는 군대와 속주의 지휘권을 넘기라고 마지막으로 요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이사르가 자신을 경호할 군대도 없이 맨몸으로 로마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에 다다르자 자신의 병사들에게 외쳤다. "자, 진군하자. 신들이 기적을 보이며 부르고 있는 곳으로. 비열한 정적들이 부르고 있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2276

우리도 "주사위가 던져졌다."고 외치려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제 나름의 열애에 빠지려면, 바디우 식으로 말해 우연성을 열어 놓기로 결단했다. 치면, 카이사르처럼 던져 놓은 숫자, 즉 인생 팔자에 과감히 내 몸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 그때만이 내 인생의 지난날 루비콘 강에서 던져 놓은 주사위는 값지게 될 것이다.

 

+2277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100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에서

 

+2278

아리스토텔레스가 연애담을 늘어놓으며 '시작'을 설명하는 책은 뜻밖에도 <정치학>이다. 우리는 여기서 명언의 첫 낱말 '시작'이 과연 무엇인지 주목하자.

그러므로 이런 다툼은 시작부터 조심해야 하고, 유력한 지도자들의 불화들은 즉시 해결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불화는 시작에 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이 반이다"라고 이야기 되듯, 시작에 있는 작은 불찰이 다른 부분에 있는 불화들과 맞먹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 텔레스 <정치학>(5권 1303b29)에서

 

+2279

이유 없이 입게 되는 상처를 불운이라 한다. 한편 악의는 없지만 이유는 있어서 입게 되는 손해를 불찰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시작에 상처의 원인이 있으면 불찰이고, 시작에 상처의 원인이 없으면 불운이다. 또 한편 의도하지 않았어도 (상처 입힐 것을) 알고 있을 때는 불의인데, 예를 들어 분노나 피할 수 없는 본성적 격정에 굴복해서 보게 되는 상처 말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1135b,18)에서

 

+2280

결국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것은 '불찰 없는 시작'을 하라는 것이다. 불찰이 상처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니, 불찰 없이 일을 시작하려면 상처의 이유를 살피는 것, 더 들어가 '자신의 몫'을 아는 것이다.

 

+2281

롤랑 바르트의 '선비와 기녀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유가 무엇일까? 하룻밤만 더 기다리면 사랑이 시작될 텐데, 선비는 그 자리를 떠난다. 왜 그렀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교훈으로 보자면, 아흔아홉 밤 선비는 '자신의 몫'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와 사랑을 시작할 때 불찰이 있는지 살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녀는 왜 이 선비의 사랑을 아흔아홉 날 동안 유예시켰던 것일까? 선비를 사랑하려면 겪어 내야 할 '자신의 몫'을 생각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대로 시작할 수도 있는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불붙는 사랑'은 황홀할지 몰라도 그 사랑은 불찰이었을 것이다. 시작에 있는 불씨만 한 불찰은 곧 이어질 전 생애의 불화와 맞먹기 때문에 아흔아홉 날의 살핌이 필요하다.

 

+2282

내가 지금 시작하려는 사랑, 내가 시작하려는 일에 나의 '몫'은 건재한가?

 

+2283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훔쳐다 몰래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대가로 매번 독수리에게 자신의 간이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하늘에 떠 있기만 하던 불을 눈앞에서 느낀 인간은 드디어 그 불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인간에게 문명이 가능해졌다. 이때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통해 인간에게 전해 준 것이 희랍어로 '테크네'라 전해진다. 이 단어는 이후 라틴어 '아르스(ars)'로 옮겨졌다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영어에서 보듯 '아트(art)'와 '테크닉(technique)'로 정착된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BC 460-377)가 <잠언집> 1장에서 말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에서 예술이 바로 이 희랍어 '테크네'다. 원래 예술과 기술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갖고 있던 테크네를 우리는 이 명언에서 아예 '예술'이라 부른다. 

 

+2284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살피기 위해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집> 1장 전문을 보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때는 촉박하고, 그 촉박한 때는 실수하기 쉬우며, 그 결단은 험난하다. 하지만 필연을 행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환자, 간호인, 외부적인 것을 위해서도 갖춰져야만 한다

 

+2285

질병을 물리법칙을 알아야 확실한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고, 그래야만 그 치료는 동일하게 반복될 수 있다. 하지만 우연에 의한 치료는 반복이 불가능하다. 이 우연에 대한 평생의 거부가 히포크라테스가 앞서 이야기한 물리법칙인 필연을 당위로 만드는 예술이었다. 

 

+2286

히포크라테스가 말하는 예술이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필연을 당위로 만든다. 그런데 타인을 위한 나의 당위가 예술이 된다는 점은 플라톤에게도 나타난다. 플라톤은 <국가론>(1권 332c)에서 예술이란 "누군가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플라톤에게서도 예술은 당위의 문제에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2287

사람은 자신이 슬픈 일을 겪는 것은 원치 않으면서도 비극을 보면서도 슬퍼하길 원합니다. 무엇 때문인가요? 관객은 비극을 통해 슬퍼하길 원하면서 바로 그 슬픔이 자신의 쾌감이 됩니다. 이것은 서러워하는 광기가 아니고 무엇인지요? 그런 감정에 의해 서러움이 클수록 그 비극은 더욱 감동을 자아냅니다. 그렇지만 혼자 겪게 되는 고통을 '미제리아(miseria)'라 말하고, 타인고 함께 겪게 되는 고통을 '메지리코르디아(misericordia)'라 말합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서

 

+2288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것을 비극에서 느끼는 '연민'이라 했는데, 거기서 카타르시스, 즉 마음의 정화가 일어난다고 했던 것과 메제리코르디아가 통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여기까지 말했다고 인생이 자동으로 연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는 핵심 문장은 이렇다.

영혼을 우리보다 더 오래, 더 높이, 더 순수하게 사랑하는 주 하나님, 당신은 상하지 않으면서도 서러워하십니다. (...) 멀리 있어도 당신의 한결같은 '서럽게 여기심'은 내 위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3권 3장)에서

 

+2289

어쩌면 우리는 연극보다 더 연극 같은 삶을 산다. 간혹 가슴 뛰는 사랑을 찾아 그 사랑에 빠지는 인생 연극을 한다. 그리고 불같은 사랑이 식으면 또 다른 사랑 찾기를 반복한다. 한사코 젊은 때나 한다는 사랑 타령이다. 연거푸 그는 그런 사랑에 빠졌다가 또 금세 싫증이 나는가 싶더니, 스스로 자신을 철문 닫힌 침대에 던져 넣는다. 그러고는 나이가 찼다고 핑계를 댄다. 얼굴에는 미소가 간혹 보이지만 더 이상 진심이 아니다. 자신의 설움도 애써 외면하고 함께 하는 자들을 서러워할 줄도 모르고 침대에 몸을 뉘일 뿐이다. 이제 당신은 어느덧 같은 대사만 읊조린다. "원래 배역은 이게 아니었어..."

 

+2290

이 같은 생각은 디오게네스가 매일 굴리고 다니던 통 속에서 나왔다. 그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았으면, 길거리에서 잠을 자고 탁발로 살면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을 누렸다. 이것이 바로 '개 같은 인생'의 실체였다. 영어 '시니컬(cynical)'의 뿌리어이기도 한 희랍어 '키니코스'는 '개(와) 같은'이란 뜻인데, '개(와) 같은 인생'은 왕이나 거지나 만인에게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2291

그러나 그 직후에 다음과 같은 점에 생각이 미쳤다. 즉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생각하려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필연적으로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이 진리는 회의론자들의 모든 가당치 않은 억측들도 흔들 수 없는 확고하고 확신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이 진리를 내가 찾던 철학의 제1원리로 망설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4부에서

 

+2292

아르케메데스는 스물두 살 때 쉬라쿠사의 히에론 왕의 부탁을 받고 '왕관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는 뛰어난 수학자로 당시 기하학에 조예가 깊어 원기둥이나 구의 부피와 넓이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왕관을 일일이 조각내어 복잡한 전체의 부피를 계산하다 보면 큰 오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키메데스는 부피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우연히 사우나를 하게 되는데, 거기서 물체가 물에 뜨는 현상인 부력을 그 문제와 연관시키게 된다. 부피 개념에서 부력 개념으로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러니까 천칭을 물속에 넣어 측정하는 물체의 부피 차이만큼 부력 차이가 생길 때 지렛대의 평형이 깨어지는 원리를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2293

아우렐리우스가 희랍어로 저술한 <명상록>의 원래 제목은 "너 자신에게로"다

 

+2294

어쩌면 현대인에게 가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은 '무시'일지도 모른다. 무시는 (본)보기가 없는 것이다. 타인도 본보기가 되지 않고 나도 본보기가 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무시하고 남도 나를 무시한다. 우리가 서로 본보기가 없는 사이, 그래서 이곳은 서로 지독하게 무시하는 사회가 됐다. 

 

+2295

"시간은 돈이다"라는 말의 출처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이 쓴 <젊은 상인에게 충고함>(1748)으로 알려져 있다.

 

+2296

도끼가 어떻게 권위의 상징이 되었을까? 철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돌도끼는 고대 인류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도끼는 사냥을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고대인들은 사냥된 동물을 고기, 가죽, 뼈 등으로 찢어 나누는 도구가 필요했다. 그때 사냥감을 해체하는 역할은 사냥에서 가장 뛰어난 공을 세운 자, 그러니까 사냥을 지휘했던 우두머리가 맡는다. 도끼를 뜻하는 한자 '부()'자도 아버지, 즉 가솔의 우두머리가 고기를 근(斥: 도끼 근, 무게 근) 단위로 식솔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2297

당신은 지금 나무를 베고 있다. 속절없이 오늘도 나무를 잘라야 하루를 살 수 있다. 강가에서 나무를 하다 도끼를 강에 빠뜨린다. 얼마나 속상한지 강둑에서 울고 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솟아나는 순간은 항상 반복이다. 내 도끼를 선택할 때, 그 반복은 기적이 된다. 잃은 내 도끼는 무엇이고, 찾은 내 도끼는 과연 무엇인지 그 마음을 챙기자.

 

+2298

이제 오비디우스가 억울한 귀양살이 동안 했던 명언 "낙수가 바위를 뚫는다"를 살펴볼 차례다. 친구에게 쓴 편지가 이 명언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다음을 보자.

키메리아 해안에 있는 나에게 여섯 번째 여름이구먼.

게타이족의 가죽옷을 걸치고 있다네.

여보게, 알비노바누스, 내 모진 삶을

어떤 차돌과, 어떤 강철과 비교할 수 있겠나?

낙수가 바위를 뚫는다. 반지라도 끼다 보면 가늘어지고,

굽은 쟁기도 땅의 마찰로 닳아진다네.

시간은 모든 것을 삼켜 파멸할 것이나, 나는 예외려니. - 오비디우스, <흑해에서 온 편지>(4권 10장 1-7행)에서

 
 
+2299
판 신은 이제 쉬링크스를 붙잡았다고 생각했으나
잡은 것은 그 요정의 몸 대신 늪지의 갈대들뿐이었다.
판 신이 한숨을 쉬자 그 숨결이 갈대를 비벼서
탄식 같은 가냘픈 소리가 났다.
판 신은 이 새로운 예술과 감미로운 소리에 빠져
"나는 이 소리로 그대와 만남을 유지하리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다른 갈대들을 밀랍으로
서로 이어 붙여 그 소녀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1권 704-710행)에서
 
 
+2300

나 만약 황제로 태어날 수 있다면

나의 백성에게 이렇게 명하리.

햇빛처럼 반짝이는 금빛 주화 위에

그대의 어여쁜 얼굴을 

새겨 넣으라고!

그리고 

이 세계가 툰드라로 변하고

강물이 북풍과 사귀는 곳,

거기에서도 나는 족쇄 위에 릴리의 이름을 새기리.

그러고는 음울한 중노동 속에서도 자꾸만 입 맞추리... - 마야콥스키, <척추 피리>에서

 

+2301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사랑하라" 세네카의 이 한마디 앞에서는 사실 다음의 말들이 있다.

나 그대에게 사랑의 속성을 밝히리니 (그 사랑은) 묘약도 아니요 방초도 아니요 주술도 아니네. 사랑받기 원한다면 사랑하라.

- 세네카, <서간>(9.6)에서

 

+2302

세네카는 다른 곳에서도 "사랑은 불안과 섞일 수 엇다."(<서간> 47.18)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국민과 가족, 친구, 배우자를 사랑할 때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온전한 사랑은 오히려 위험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게(<서간> 76.20)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순수하고 때가 묻지 않았으면, 너그러울 뿐만 아니라 그 열정이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욕망이다. 반면 사랑을 해도 불안하다는 것은 그 사랑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할 때 불안한 이유, 그러니까 사랑이 온전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에 타자의 욕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랑받기를 원할 때 생기는 불안이다.

 

+2303

소크라테스는 겉보기에는 알키비아데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랑하기 위해 쫓아다니고, 알키비아데스는 그 사랑을 받기 위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향연>에서는 오히려 알키비아데스가 사랑받기에서 사랑하기로 그 관계를 뒤집는 모범이 된다.

 

+2304

마야콥스키는 죽기 전에 한 장의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릴리, 날 사랑해 주오." 이것이 유서로 남긴 문장이다. 제발 후대인들이 흥밋거리를 위한 허구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이 유서가 사실이라면, 그는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기'에 집착한 혁명가였다. 물론 서두에 소개한 <척추 피리>로 본다면 그는 사랑하기를 다짐했던 혁명가, 온전한 사랑을 하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13년이 지난 시점의 마야콥스키는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라.'를 실천하지 못했다. 마지막 말, "날 사랑해 주오"라는 말에서 '사랑받기'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그의 욕망이 읽힌다.

 

+2305

당신은 자유민주주의 안에 살고 있다. 하지만 선택지가 많지는 않다. 권력은 누구든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기를 원하는 생리가 있다. 좀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노예처럼 굽실대기를 원한다. 자유를 절대 용납하지 않지만, 그 수법은 은근하다. 그래서 이 시스템의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는 아무리 자유를 누린다 해도 노예로밖에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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