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2306
어떤 밤,
꽃이 진 자리라던가
달빛이 모여있는 자리를 걸으면
다리가 순식간에 휘청거리곤 했습니다
+2307
가만히 흘러가는 하루 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동공은 이 대용량의 끝없는 장면을
어떻게 저장하나 놀랍다.
심장은 이 영화를 어떻게
한평생 제멋대로 재생하나 놀랍고.
+2308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라 산책인가
밤공기 속에 누가 이토록 숨 쉬는 문장을 숨겼나
+2309
숲은 자연의 심장이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아래로도 맥박이 뛰었다
+2310
전나무 꼭대기에서 보았지
오늘이 처음 착륙하는 자세를
+2311
이곳엔 막 도착한 딱새가 밤이 눈동자를 디디곤 다시 날아올랐다...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2312
오래전부터 손톱 밑에는
아무도 모르는 당신이 박힌 까닭에
+2313
모든 게 시시해지면 나는, 나 같은 것도 뒤적거렸지
+2314
한때는 우리, 라는 인칭 안에서 쓸모를 다했던 말들이 서서히 죽어가는 장면을 봐
백지 위에서 뚝뚝 부러지는 연필심처럼, 자꾸만 무릎 꿇는 독백을 끌어안고 울 때
살아서 팔딱이는 당신, 이라는 단어를 밟아 죽일 수도 없을 때
어째서 당신은 이토록 살아남는가
+2315
떠나간 누군가를 멀리 보내본 사람의 언어이다
+2316
눈빛이 눈빛에 착지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안개 속에 갇혀 있었나
+2317
불을 끄고 침상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제 지구의 종말은 내 눈꺼풀 하나에 달렸다
+2318
슬픔의 능력
네, 저는 청승의 힘으로 삽니다
아직 남아있는 수분이 있는 것만으로도
제법 벅차고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이 무지건조한 세상 속에서
이 몸 하나쯤은
온통 젖은 채로 살아볼 작정입니다
저는, 슬픔의 능력을 믿습니다
+2319
웅크려 있으니 오늘도 내 몸이 무덤이구나 생각했다
+2320
꽃밭
아픈 자리엔 꼭 꽃이 피더라
요즘은 평형감각을 잃어 정강이를 자주 부딪힌다
통증이 스친 자리엔 보랏빛 멍이 꽃처럼 피었다
살갗도 요즘은 재생이 더디어
꽃들이 오래오래 남아 있더라
점점 꽃들이 많아져서
치마도 못 입겠다
그래도 이 몸은 이제 꽃밭인가 보네, 생각했다
+2321
살아있는 나는,
나와도 하루하루 멀어져 가는 중이다
+2322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새들의 용기가
날개짓 한 번에 하늘까지 솟아오르는데도
더 내려칠 바닥이 없는지
자꾸만 땅을 바라보는 인간이지만
+2323
이제, 내 안에서 나를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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