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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ing

의기양양한 패배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 중

#19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좋아한다. 좌우대칭의 반듯한 인물구도와 아름다운 색감, 회화처럼 하나하나 계산된 미장센과 인물들의 무심한 대사처리… 연극과 만화 그 사이 어디쯤 자리 잡은 느낌이 늘 내 시각과 마음을 간지럽혔다. 근데 그의 영화를 더 좋아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뒷이야기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이 영화는 한 소녀가 어느 공원으로 책을 들고 찾아가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 공원의 중앙에는 한 근엄한 남자의 흉상이 보인다. 흉상에 적힌 글은 ‘국가의 보물과 같은 작가’. 그리고 소녀의 책 제목이 보인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영화에서는 그냥 ‘작가’라고 언급됐던 그 남자의 이름을 나는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의 메이킹북을 통해 짐작하게 되었다. 영화 속에는 액자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로 나오지만, 메이킹북에 의하면 그는 웨스 앤더슨에게 이 영화의 모티브를 준 ‘슈테판 츠바이크’에 대한 오마주였다. 칼뱅이란 종교 개혁가이지만 또 하나의 독트린에 맞선 ‘카스텔리오’에 대한 이야기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썼던 바로 그 작가였다.

자신의 용기에 도취된 상태로 쓰러지는 사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확신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에도 확고하고 경멸에 찬 눈길로 적을 응시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운명의 손에 의해 한 방 얻어맞는 법이다. 그는 죽임을 당할망정 물러서지 않는다.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대개는 가장 불운한 사람들이다. 승리를 갈구하는 의기양양한 패배도 있다.” – 몽테뉴 

이 인용은 카스텔리오에 대한 츠바이크의 헌사이자, 그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다. 그의 마지막 저작인 <어제의 세계>는 그 자신의 회고담이다. 여권도 없이 나라와 나라를 오가던 자유와 환희의 시대를 거쳐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사라진 세계를 이제 회복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 아니 가장 행복한 기억을 가진 자신으로 어제의 세계에 머문 상태로 퇴장하겠다는 다짐으로 브라질에서 권총자살하기 전까지 썼던 책이었다.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었던 츠바이크는 어제까지 친구들과 만나러 오가던 나라가 적국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져 가던 그의 세계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과 20년 만에 다시 발발한 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붕괴된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등장으로 인해 세계에 절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자살이 아닌 자유살인-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선택 -이라고 그의 자살을 규정했다. 돌아오지 않을 어제의 세계에 대한 절망이 이유이겠지만, 그가 선택한 명분은 절망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선택. 스스로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가진 지금. 기억의 보관을 자유의지로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웨스 앤더슨은 츠바이크가 간직한 유럽의 기억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재현한다. 다 바스러져가는 현재의 호텔에서 출발한 영화는 아름다웠던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처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자유와 품위와 환대가 가득한 곳으로 그려낸다. 결국,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카스텔리오도 츠바이크도 물러서지 않음으로써 사라짐을 당한다. 하지만, 승리를 갈구하는 의기양양한 패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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