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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ing

카페스토리

페인트커피 PAINT Coffee in 왕십리

#21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보건소에서 난생처음 남의 손에 콧구멍을 힘차게 찔리고, 그 이질감에 눈물을 찔끔 흘리곤, 터덜터덜 걸어가던 중이었다. 콧구멍과 목구멍 그 어디쯤 한 번도 손 닿지 않았던 순수한 내부의 속살이 자극받아서 일까? 어느덧 내 발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옻칠공방, 2평 남짓한 동네 미용실, 증기다리미가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세탁소를 지나자 소담한 성당이 나왔다. 성당의 담은 성인 남자의 가슴 높이였고,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성당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때마침 유아반의 아이들이 수녀님을 따라 어디론지 나들이 갈 모양인지 재잘거리며 줄을 서고 있었다. 성당 외벽 앞엔 커다란 성모 마리아의 조각이 두 팔을 내밀고 있었고, 아이들을 향해 두 팔을 내밀고 줄을 세우는 수녀님의 모습과 중첩되어 나도 모르게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성당 맞은편에 한 카페가 있었다. 이런 곳에 카페가? 애써 찾아오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뒷골목이었다. 근데 그 카페의 외관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렌지빛이 도는 나무로 문과 입구 덱, 창과 테이블이 꾸며져 있었다. 카페의 전면은 상부는 창, 하부는 오렌지빛 나무로 구획정리가 되어있는데, 창문이 들창으로 되어 있었다. 위로 힘껏 젖혀져 기분 좋은 봄바람을 안으로 부르고 있는 창 안에선 분주히 커피를 내리는 주인의 모습이 보이고 손님들은 들창이 난 쪽에 일렬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저 창가에 앉으면 맞은 편 성당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올 터였다. 나도 모르게 카페로 들어서 커피를 주문하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PAINT라는 이름의 그 카페는 오렌지 색 페인트통을 쌓아 둔 소품과 페인트칠할 때 쓸 법한 낮은 사다리와 공구 모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도 <시암 선셋 Siam Sunset> 같은 오렌지 빛깔을 테마로 한 영화들로 선별되어 있었다. 작지만 확실한 감각으로 꽉 찬 공간이었다. 나의 동네 단골 카페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출근할 때 들려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주말엔 책 한 권 들고 들렸더니, 어느덧 카페의 주인과도 제법 몇 마디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주인이 인스타로도 열심히 카페를 알린 덕분인지 이 외진 골목의 카페는 나름 핫플레이스가 되어 사람들이 찾아와 예의 그 들창 밑에 앉아 사진을 찍곤 했다. 그렇게 2년 남짓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주인이 이전하게 되었다고 말을 건넸다. 주위에서 알아봤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아쉽지만 성북동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정든 아지트가 사라지는 기분에 아쉬웠다. 옮겨가는 곳에 한번 들르겠다고 인사를 했고, 그렇게 성당 앞 카페는 이사를 갔다.

 

몇 달 후 옮겨간 카페에 찾아갔다. 새로운 카페 역시 이면 도로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 커진 간판이 보여 역시 더 큰 곳으로 옮겼구나 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가로로는 넓은 데 안의 공간이 너무 작았다. 밖에서 보기에 카페의 앉을 자리는 기껏해야 서너 테이블 정도. 여전히 오렌지색 나무로 꾸며진 공간에 예의 그 들창이 반겨주었다. 그리고 카페 안쪽의 벽 한편이 큰 오렌지색 나무 진열장으로 꾸려져 있었다. 이 진열장을 가득 채운 것은 색감 좋고 보기 좋은 타이포가 눈길을 사로잡는 수입캔디, 초코바, 스낵 같은 글로서리들이었다. 근데 유심히 들여다보니 수입과자들 사이에 이상한 손잡이가 있고, Pull이라고 적힌 게 아닌가. 그것을 당기자 진열장이 문이 되어 열리며 그 안엔 아주 커다란 카페가 나타났다. Speakeasy Bar, 미국 금주법 시대에 비밀 영업을 하던 bar들을 부르던 말인데, 책장이나 냉장고 같은 비밀문을 만들어 아는 사람만 들어오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Paint Coffee & Bar로 이름이 바뀌었구나. 역시 하며 감탄하고 들어섰다. 저 멀리 그리운 얼굴이 된 주인이 반갑게 인사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멀어 자주는 못 들리지만, 이따금 책을 들고 찾아가곤 한다. 오늘, 오랜만에 이곳에 들렸고, 난 이곳에 앉아 이곳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한다. 시작은 콧구멍이 쑤셔진 날의 기억이다.

 

PAINT coffee & bar in 성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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