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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혹은 여행처럼

<여행, 혹은 여행처럼> 인생이 여행에서 배워야 할 것들

 

[밑줄]

+2360

여행을 일상의 탈출로 보는 의견에 반대한다. 그보단 차라리 매 순간 여행자의 태도로 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삶 속에선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361

아도르노는 진정한 불의는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자를 불의로 설정하는 장소에 있다고 말했지. 그 여름에 내가 너를  불의의 세력으로, 나를 정의의 세력으로 내 맘대로 결론 내린 것 미안해.

 

+2362

한때 BBC 방송국의 피디였던 조지 오웰은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의 '시와 마이크'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송에서 청취자는 어차피 어림짐작이지만 '단' 한 사람 같은 존재다. 수백만이 듣고 있을 수도 있지만, 각자 혼자 듣고 있거나 작은 그룹의 일원으로 듣고 있으며, 그 각자는 방송이 자기에게만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은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방송하는 입장에선 청취자들이 공감하거나 최소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여겨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따분한 사람은 언제든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2363

나에겐 비밀 릴테이프가 있었다. 아날로그 시절 라디오 방송은 모두 릴테이프에 녹음되는데 녹음 당시의 헛기침, 코 훌쩍거리는 소리, 이상한 발음은 녹음 후에 모두 편집된다. 이상하거나 불필요한 소리들은 모두 방송용 가위로 잘라내는데 미장원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생각하면 된다.

 

+2364

우리에게 대부분의 여행지는 한 번 만나고 다시 못 볼 사람과도 같다. 여행자인 우리들은 낯선 무엇인가에서 의미를 끌어내고 감탄하고 기억 속에 넣으려 애쓴다. 그걸 더 확장하자면 프랑스 철학자 바디우의 "당신이 결코 두 번 보게 되지 않을 것을 사랑하시오"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2365

나는 대학의 격물치지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해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인간의 집요한 탐구가 어떻게 내면의 혁명적 눈뜸으로 이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2366

여행 중에 우린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질문을 하곤 한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이 최초의 질문에서 서로 다른 존재들이 연결되고 하늘의 별자리 같은 심오한 관계들이 만들어진다.

 

+2367

인생은 어디로 떠나거나

오래 걷는다고,

어딘가에 닿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 송경동, [세월이 가면] 중

 

+2368

지도는 안정적이고 고정되고 굳어진 땅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갯벌은 일반적 지도에는 매핑(mapping)되지 않습니다.... 지도화할 수 없는 땅을 개발하여 지도 안으로 포섭하기보다는 지도화할 수 없는 당의 기억과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지도를 만드는 것.

 

+2369

그 한국인 이민자는 그때 내가 만들어준 지도를 보고 세탁소를 인수했습니다. 저는 그때 내가 누군가에게 정말로 실절적인 도움을 주었구나 싶어서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우리 형은 가끔씩 소파에 앉아 그때 당신이 만들어준 지도를 보곤 한다"는 그 이민자의 이야길 듣고 또 기뻤습니다.

 

+2370

지도를 그리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세상은 정보로 넘쳐나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에는 취약하다는 겁니다. 눈이 바깥으로만 향해 있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고 있진 않습니다. 자기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 지도를 그리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섬세하게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좌표와 나침반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2371

마음을 매핑하는 지도의 좌표가 X축 Y축으로 구성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도 합니다. 둥근 지구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3차원의 일을 2차원으로 옮기는 것이 좌표인데, 이 말은 인간이 복잡한 의사 결정을 할 때는 결국 중요한 두세 가지로 할 수밖에 없단 말이기도 합니다. X축 Y축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돈으로 할 것이냐? 명예로 할 것이냐? 혹은 다른 것으로 할 것이냐? 이 좌표가 나와야 출발할 수 있습니다. 

 

+2372

한번은 우리 선생이 필사하라고 넘겨주는데 딱 한 글자에 먹물이 튀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 단어가 무엇일까? 하나의 단어를 추측하기 위해선 그 페이지, 그 책 전체를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빈자리 하나 메우는 데도 그 책 전체에 대한 승부를 거는 겁니다. 그리고 더 크게는 그 학문 전체에 대한 승부를 거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승부를 걸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거기에 집중하는 것뿐입니다.


+2373

로마 바티칸에는 비밀문서 보관소가 있습니다. 그 문서 보관소는 천 년에 한 번 열립니다.

 

+2374

라틴어에 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말입니다. 천천히 서두른다는 것은 뭐지요? 어쨌든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2375

한 개인의 기억이 그 개인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는지 알 수 없어도 기억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내게 일어난 일이 날아간 화살만큼, 그만큼 거리를 두고 돌아올 때 그것은 사건이면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376

필리핀의 한 가난한 행상 아낙이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젖먹이에게 김 빠진 코카 콜라를 먹일 때, 내가 그 여인을 기억할 때, 나는 그 여인이다. 이스탄불 한 소년이 아버지를 찾아 술집 문 앞에 서 있을 때, 내가 그 소년을 기억할 때, 나는 그 소년이다. 내가 도착하는 모든 여행지에서 만났던, 결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내가 기억할 때,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책을 읽을 때 나는 나지만 또 나는 내가 아닌 것처럼, 보르헤스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자는 그 순간 셰익스피어고 호머를 읽는 자는 그 순간은 호머라고 했던 것처럼, 여행지에서 우리는 우리지만 우리가 아니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지만 수없이 많은 영혼이다.

 

+2377

매번 여행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영혼이 되어 돌아오기를 꿈꾼다. 내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내 기억도 조금씩 다른 기억이 되고, 나도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고, 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그런 식으로 세상의 일부가 되고.

 

+2378

인간 영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을 본 자들은 지혜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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