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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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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4

인간은 필요하면 거의 모든 것에서 원하는 바를 찾아낸다. 외로운 영혼이 건설 현장 덤프트럭에서 심리적 위로를 얻었다고 해서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따뜻한 손길이 그립다 보면 녹슨 포클레인에서도 따쓰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동양 고전에서 무엇을 찾아내든 상관없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문제는 그것을 만병통치약으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팔 때 시작된다. 그러한 부류의 고전 해석은 해당 고전보다는 그 판매자에 대해서 보다 많은 것을 알려준다. 누군가 덤프트럭에서 정서적 위안을 얻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덤프트럭에 대해서보다는 덤프트럭에서조차 위안을 찾아야 하는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는 것처럼.

 

+2395

허위의식 중 대표적인 사례는 동양 고전을 통해서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동양'이라고 부르는 폭넓고 느슨한 전통에서 가장 강해 보이는 무기를 골라 '서양'이라고 부르는 역시 폭넓고 느슨한 전통에서 가장 취약해 보이는 지점을 타격한다... 그러한 주장의 근저에 있는 다소 서글픈 허위의식을 드러낸다. 씹을 수도 없을 정도로 큰 빵을 억지로 입에 넣고 버둥대는 작지만 탐욕스러운 입술들처럼.

 

+2396

어제 맛있는 케이크를 먹음으로써 인생의 허무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한 것 같았어도, 오늘 다시 배가 고파지면 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인생의 허무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보다 맛있는 케이크를 찾아 오늘도 새로 문을 연 제과점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이다.

 

+2397

학생은 떠났겠지만, 선생이 아주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중년에 이른 많은 학자들은 알게 된다. 젊은 시절의 폭음과 방탕함이 결국 이제 와서 자기 학문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체력이 달려 정신을 집중할 수 없는 자신에게 한탄을 거듭하는 한밤중. 노크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 보면, 라면과 소주로 하릴없는 나날을 보내던 젊은 날의 자신이 거기 서 있다. 영양이 부실하여 초가을 추위에도 부들부들 떨면서 망연한 모습으로 거기 서 있다. 전 당신이 내팽개쳤던 젊은 날 당신의 육체예요. 평생 공부하는 삶을 살 거였으면서 왜 젊은 날 그렇게 학대했죠? 양질의 고기 한 점 입안에 안 넣어주고...

 

+2398

어떤 것에 대한 침묵이 다른 것에 대한 발화로 해석되기도 하고, 다른 것에 대한 발화가 어떤 것에 대한 침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엄혹한 나치즘의 시대를 살았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 세상에 널린 끔찍한 짓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죄악이라면 / 그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후손들에게' 중에서)

 

+2399

이 사람은 다르다. 선생을 알아본 나는 학교 앞 서점에 가서 그의 저서를 샀다. 선 채로 서문을 읽었다.

 

+2400

숭배의 대상이든 혐오의 대상이든,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느닷없는 천재나 악마는 사실 드물다.

 

+2401

실패를 예감하며 실패로 전진하기

 

+2402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이영광, '사랑의 발명')

 

+2403

그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이제 더는 살지 못하겠다고 스스로 구덩이에 들어가 하늘을 보고 죽음을 청하려 든다. 그러한 자살 행위는 '신이라는 가장 결정적인 관객을 염두에 둔 최후의 저항'이자 '인간이 무책임한 신을 모독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이리하여 이 시는 단지 술집에 절박하게 마주 앉아 있는 연인 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사 이래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 같은 이야기가 된다.

 

+2404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데 너무 익숙하다. 상대의 정확한 모습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상을 사랑한 대가는 혹독하다.

 

+2405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 The Discourses]에서 "사람들의 이기심은 능력자가 중요한 일에 필수적인 권한을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2406

공자는 중용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못 박는다. 규범을 뛰어넘으려면 규범을 일단 숙지해야 하고, 장르를 비틀려면 일단 장르의 규칙을 알아야 하고, 장애물 경주에서 우승하려면 장애물을 우회하지 않고 뛰어넘어야 한다. 그것은 오랜 숙련을 거친 소수의 사람에게나 가능하다.

 

+2407

엄중한 상황은 예외적인 조처를 요구한다

 

+2408

주검을 대충 파묻지 않고, 예식에 맞추어 유골을 하나하나 추리고, 형태대로 가지런히 놓고, 칠성판 위에 삼베로 묶은 유골을 놓은 뒤, 적절한 장송곡에 맞추어, 천천히 관에 넣는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원래는 없던 엄숙한 마음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2409

2019년 5월 13일 자 <한겨례> 기사를 보면, 현재 한국의 요양원 대다수는 죽음의 길로 방치되는 현대판 고려장에 불과하다. 평생 위태롭게 지켜왔을 삶의 존엄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버리게 되는 곳.

 

+2410

"여러분은 지금 군사독재 정권이 물러나야 한다고 한창 데모 중이지 않습니까. 군사정권의 수뇌들은 대개 사관학교 출신이지요. 여러분이 비판하는 그들은 사관생도 시절에 명예시험이라는 것을 치른다고 합니다. 시험 감독이 없더라도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부정행위 없이 시험을 치른 뒤에, 스스로 답안지를 걷어 선생님에게 제출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군사독재 정권에게 물러나라고 비판하려 한다면 적어도 그들보다 명예가 낮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시험 감독 없이 명예시험을 치러 봅시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열심히 시험 감독을 하시는 대신 창밖을 망연히 쳐다보며 한동안 서 있다가 급기야는 시험장을 떠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날 부정행위를 하는 학생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2411

재현은 실증이 아니다. 재현은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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