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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2
시인이 할 일은 이름이 없는 것의 이름을 부르고, 부정한 것을 가리키며, 자세를 바로잡는 것, 그리고 논쟁을 시작하고, 잠들기 전까지 이를 세상에 표현하는 것이다. - 살만 루슈디
+2583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천둥은 번개가 번쩍인 것을 공표한다"고 썼다. 번개가 먼저 번쩍이고 그다음 천둥이 울린다. 번개가 생이라면 천둥은 시일 테다... 멕시코 시인의 저 문장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아울러 이 문장은 사실의 전달을 넘어서는 하나의 은유로 오롯하다. 은유라는 한에서 이 문장은 사실을 넘어서는 사유를 무한 확장하는 힘을 갖는다. 나는 시가 생성되는 핵심이 '은유'라고 보았다. 시는 말의 볼모이고, 시의 말들은 필경 은유의 볼모다.
+2584
시는 말의 춤, 사유의 무늬, 생명의 약동이다. 시는 수천 밤의 고독과 술병을 집약하고, 세계를 향해 뻗치는 감각의 축수들은 천지만물의 생리와 섭리를 더듬는다.
+2585
윌트 휘트먼은 한 아이가 풀임을 따와서, 이것이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내 기분의 깃발, 희망찬 초록 뭉치들로 직조된 깃발"이라고 말한다.
+2586
바닥은 벽은 죽음의 뒷모습일 텐데 그림자들은 등이 얼마나 아플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무용수들이 허공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를 때 홀로 남겨지는 고독으로 오그라드는 그림자들의 힘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한 사내가 또는 한 아이가 난간에서 몸을 던질 때 미처 뛰어오르지 못한 그림자의 심정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몸은 허공 너머로 사라졌는데 아직 지상에 남은 그림자는 그순간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니
- 이원, <그림자들>
+2587
우리는 실체의 삶을 살려고 하나 많은 경우 그림자의 삶을 살다 간다
+2588
대상과 은유 사이에는 엄연하게 벌어진 틈이 있다. 대상과 은유 사이가 벌어질수록 은유의 효과는 커진다. 틈이 생긴다는 것은 항상적 불일치, 혹은 낯설게 함을 전제로 삼는다. 은유를 만드는 자들은 은유를 전유하면서 이 틈의 이격 효과를 손아귀에 넣는다. 이 틈이야말로 의미가 말없이 깃드는 장소이니까.
+2589
지구와 태양과 동물을 사랑하고, 부자들을 경멸하며, 질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시혜를 베풀며, 바보스럽고 미친 사람들을 위해 항의하며, 소득과 노동을 다른 사람들에게 바치고, 독재자들을 증오하고, 하느님에 대해 논쟁하지 않으며, 사람들에 대한 인내심과 즐거움을 갖고,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어떤 것에도, 어떤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들이든 누구에게도 모자를 벗지 않으며, 강력하나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과, 젊은이들과, 가족들의 어머니들과 자유롭게 다니고, 해마다, 계절마다 이 열린 대기에서 이 잎사귀들을 읽으며, 학교나 교회에서, 혹은 어떤 책에서 들은 바 전부를 재차 시험하고, 당신 자신의 영혼을 욕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배척하라. 그러면 당신의 바로 그 몸이 위대한 한 편의 시가 되어 언어에서뿐만 아니라 입술과 얼굴의 말없는 주름과 눈썹 사이에서 당신 몸의 모든 움직임과 관절에서 가장 풍요로운 유려함을 누리리라.... 시인은 불필요한 작업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 월트 휘트먼
+2590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 최승자, <삽십세>
+2591
이곳에선 날마다 창세기의 첫 줄이 불타고 있다
- 홍일표, <백치 거울> 중
+2592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중
+2593
무엇이 장미인가? 참수된 뒤 자라는 머리.
무엇이 먼지인가? 대지의 허파가 뿜어낸 탄식 일성.
무엇이 비인가? 먹구름의 열차에서 내린 마지막 승객.
무엇이 애탄 근심인가? 구김살과 주름살, 신경의 견직물 상의.
무엇이 시간인가? 우리가 입고 있는 옷, 다시는 벗어버릴 수 없는.
- 이도니스, <의미의 숲을 여행할 때 필요한 몇 가지 지침> 중
+2594
얼음이 녹는 건 슬픈 일
얼음이 녹지 않는 건 무서운 일
어떻게든 살기 위해
남몰래
천천히 녹는다
- 오은, <야누스> 전문
+2595
신이나 인간은 예외 없이 이름을 갖는다. 반면 개구리나 뱀이나 멧돼지 같은 동물들은 이름이 없고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는다. 동물이 이름을 갖는 것은 매우 예외저인 상황이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어느 마을의 소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관습을 언급하며, 이름이 '영혼의 표지'라고 말한다. 이름을 갖는 한에서 소들은 익명적이고 수량적인 것의 범주를 넘어서서 '영혼'이라는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름으로 호명된다면 동물들도 영혼을 가진 존재로 탈바꿈한다.
+2596
유령들이 활개치는 세계에 살면서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는 사람이 매달리는 도덕적 가치는 '진정성'이다. 그러나 이 '진정성' 찾기를 '근대성의 질병'으로 낙인찍는 젊은 철학자가 있다. 앤드류 포터는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란 책에서 반문한다. "경쟁과 이기주의, 속이 텅 빈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진실한 인간관계와 참된 공동체가 사라진 천박한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우려는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불편한 모순을 야기한다. 천박성과 거짓됨을 자인하는 사람도 없고, 다들 그렇게 진정성을 갈망한다는데 어째서 세상은 날마다 점점 더 진정성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일까?" 진정성은 사라졌다. 진정성이 사라진 세계에서 '진정성'은 가장 인기를 끄는 소비품목이다. "진정성이 자기 급진화와 역학을 탑재한 지위재라는 사실을 일단 인식하면, 진정성 추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각종 이상한 행위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2597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이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전문
+2598
더 많은 무신론자들이 제 시간과 수고를 봉급과 맞바꾸며 세속 세계에서의 삶을 꾸린다.
+2599
자본이 지배하는 세속 사회는 가장 먼저 효용성이 없는 것들, 즉 시와 철학을 제거한다. 철학은 "불행한 시인이 명예롭게 피신할 수 있는 병원"이고, "시인의 한탄은 비판적 예언, 즉 철학"이라는 점에서 시와 철학은 한 아버지 아래 두 어머니의 자궁을 빌려 태어난다. 시와 철학은 이복형제다. 그들이 축출된 뒤 세계에는 무엇이 남는가? 예언자 없는 사회에서 누군가는 구원을 약속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소임을 맡을 적임자는 시인이고 철학자지만 오늘의 시인은 철학을 잃고, 철학자는 시를 잃었다. 이들은 무력하다. 오늘의 시가 가끔씩 찰나의 섬광들로 예언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지만, 대개는 "욕망의 꿈틀거림이고, 불화의 부르짖음"이다.
+2600
이토록 고요한 세상을 봐
별들로 하늘이 뒤덮인 밤
자리에 일어나 시대에, 역사에, 세계에
말을 걸 시간
-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미완성의 시> 중
+2601
얼마나 많이 귀 기울여야
사람들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에 실려 있네
바람에 실려 있다네
- 밥 딜런, <바람에 실려>
+2602
내가 사랑하는 소리
나는 모든 소리들을 그것들이 사용되는 순간에 듣는다
도시의 소리들, 도시로부터 나오는 소리들
낮과 밤의 소리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젊은이의 소리
생선 장수, 과일 장수... 식사하는 노동자들의 커다란 웃음
어긋난 우정의 노기 띤 저음... 아픈 사람의 가녀린 어조
책상에 손을 붙인 판사, 사형 선고를 내리는 그의 떨리는 입술
부두에서 짐을 내리는 하역 인부가 가슴 부풀려 내는 소리... 닻 올리는 선원의 후렴 소리
자명종 울리는 소리... 불이야 하는 소리... 빠르게 나아가는 기계의 윙윙 소리
경고 종과 색깔 등을 단 호스 운반차의 붕붕 소리
기적소리... 다가오는 객차의 단단한 바퀴 소리
군중의 앞머리에서 밤중에 이어지는 느릿한 행진곡
- 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중
+2603
소리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 생각과 습관을 바꾸고, 우리 존재를 새롭게 빚는다.
"나는 오랫동안 듣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들은 바를 내 속으로 불어넣고... 소리들이 나를 위해 기여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