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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부탁

사소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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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호남 지방에 내려가 웬만한 식당에 들어가면 스무 가지 서른 가지 반찬이 그득하게 차려진 밥상을 받을 수 있다.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호남 사람들이, 비록 부잣집에서라고 하더라도, 일상적으로 그런 밥상을 차려놓고 먹었던 것은 아니다. 내 아버지 세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런 차림은 일제 강점기에 목포나 군산 등지 미두장에 투기꾼들이 모여들면서 생겨난 여관의 밥상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잔칫집 같은 데서 "이게 여관집 밥상인가"하며 불평하는 어른들을 본 적이 있다. 차린 것은 많은데 먹을 것은 없다는 뜻이다.

 

+260

그래서 저 밥상을 생각하게 된다. 문화를 과시하고 소비하려는 기획은 많지만, 문화의 창조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산적 이용의 전망을 발견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 온라인의 실정이다.

 

+261

민족이 한쪽이 나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도와야 하는 것은 우리다. 남북은 가장 가까운 핏줄로 연결되어 있고, 수천 년 동안 같은 운명 앞에 서 있었고, 또다시 긴박한 위험을 목전에 두고 같은 운명을 고뇌하고 있다. 함께 번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실천하는 지혜가 진정한 앎이며, 한쪽의 동포가 비극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도록 도울 수 있는 힘이 진정한 국력이다. 거기에서가 아니라면 한 국가의 자존심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262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형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기에 우리의 패배를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흉악범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일상이기 때문이다.

 

+263

어쩌면 모든 상투적인 말이 다 비장한 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늘 염원하면서도 내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희망을 그 상투적인 말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상투적인 말이 되도록 놓아둔 것은 늘 보던 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다른 것을 볼까봐 오히려 겁을 먹는 우리들의 나태함일 것이 분명하다. 말은 제 힘을 다해 우리를 응원하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해버린 탓일 것이 분명하다. 상투적인 말들도 처음에는 그 날카로운 힘이 우리의 오장에 파고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이 나를 넘어뜨리고 내 안일을 뒤흔들 것이 두려워 우리가 철갑을 입을 때 말도 상투성의 철갑을 입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들이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264

언젠가 서울의 교외에서 '들꽃 피는 언덕'이라는 간판을 단 카페를 본 적이 있다.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나 옛날 같으면 단지 '언덕'이라는 말만으로 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언덕'은 꽃 피는 언덕도 되고 눈 내린 언덕도 된다. 언덕 앞에 붙는 다른 말의 길이만큼이나 우리말이 힘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카페의 풍경에 대학의 박사학위 심사 모습이 겹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단어를 무슨 뜻으로 썼느냐고 심사위원이 물으면, 그 단어는 영어의 어느 단어에 해당한다는 대답이 나오고 좌중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그 힘을 외부에서 빌려오는 것이다.

 

+265

적어도 인문학 문야에서라면, 그 첨단적 사고는 제 나라 말로 강의하고 제 나라 말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만 돌출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간의 깊이란 의식적인 말이건 무의식적인 말이건 결국 말의 깊이인데, 한 인간이 가장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그 존재의 가장 내밀한 자리와 연결된 말에서만 그 깊이를 기대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66

'숲에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고 말할 때 '살랑살랑'은 바람의 세기와 성질을 어느 정도 전달하지만 그 바람을 개별화해주지는 않는다. '살랑살랑'을 쓸 수 있는 바람은 많지만 글쓴 사람이 표현하려고 하는 바람, 그 시간 그 숲에 불었던 바람은 유일한 바람이다. 똑같은 바람이 두 번 다시 불지는 않는다. 이렇게 말하니 모파상이 전하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플로베르는 제자 모파상에게 '온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두 알의 모래나, 두 마리 파리나, 두 개의 손이나, 두 개의 코가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나서 "어떤 인물이나 사물을 단 몇줄의 문장으로 뚜렷이 개별화하고 다른 모든 인물이나 사물과 구별될 수 있도록 표현하라"고 했다. 어쩌면 당신은 세상에 똑같은 것이 없다고 해서 꼭 그것을 구별해서 표현해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글을 통해 당신의 존재와 생각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싶다면 조금 달라질 것이다. 당신의 모든 것이 수많은 '살랑살랑' 속에 묻혀버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267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려는 '일물일어설'의 욕구는 그래서 평면에 깔린 자연과 삶을 본디 모습 그대로 복구하려는 기획과 이어진다. 정확하고 적절한 묘사는 마치 쭈그러든 축구공에 불어넣는 바람과 같아서 땅에 붙은 삶에 다시 그 입체감을 회복해주고, 존재와 사물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준다. 상투적인 글쓰기는 소박한 미덕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식민 세력에 동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신의 삶에 내장된 힘을 새롭게 인식하려 하지않고, '산다는 것이 늘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남이 가지 않는 다른 길을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다른 길은 그렇게 멀리 잇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당신이 저 상투적인 '살랑살랑' 대신 다른 말을 써 넣는다면 당신은 벌써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벌써 예술가다.

 

+268

옛사람들이 여름날 냇가에 솥을 걸고 끓이는 잡고기 매운탕이나 개장국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웃옷을 벗고 배를 두드리며 먹는다는데 있었을 것 같다. 냇가에 솥만 걸면 그것이 곧 잔치이며, 잔치는 두 손과 배로 참여하는 것이다. 희생된 생명들은 거기서 생명이기를 그치지만 그것들과 하나가 되려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행복의 형식으로 다시 피어난다고 말해도 무정한 말이 아닐 것이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은 도끼라고 니체는 말했다. 도끼는 우리를 찍어 넘어뜨린다. 이미 눈앞에 책을 펼쳤으면 그 주위를 돌며 눈치를 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에 우리를 다 바쳐야 한다. 그때 넘어진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일어난다. 책이라는 이름의 도끼 앞에 우리를 바치는 것도 하나의 축제다. 몸을 위한 정신도 정신을 위한 음식도 겉도는 자들에게는 축제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269

창작하는 사람에게 표절의 욕망은 그 창조 의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면, 창조의 의지는 정복의 의지와 같다. 창조는 우리가 손님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어떤 풍경 하나를 만들어 덧붙임으로써 제한된 시공에서나마 이 세상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것은 그 결함이 제 눈에 보이지만 남의 창작품은 늘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완벽함의 주인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에 대한 욕망은 다른 모든 욕망을 압도할 수 있다.

 

+270

정염의 세계에서는, 정염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로 그 정염입니다. 정염은 욕망에 소망을 붙여놓지요. 욕망하는 한은 행복함이 없이도 살 수 있어요. 행복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행복이 전혀 찾아오지 않으면, 희망이 연장됩니다. 공상의 매력은 그 원인이 된 정염만큼 깊어지지요. 따라서 이 상태는 스스로 충족되며, 거기서 비롯한 불안은 현실을 보충하는 쾌락의 일종으로 어쩌면 현실보다 더 낫지요. 더이상 아무것도 욕망할 것이 없는 자 불행하구나! 그런 사람은 말하자면 자신이 지닌 것을 모두 잃지요. 인간은 자기가 얻은 것보다 희망하는 것으로 더 즐거워하며,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합니다. 사실 인간은, 갈구하나 유한하며, 모든 것을 원하나 얻는 것은 적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어떤 위로의 힘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그 힘은 그가 욕망하는 모든 것 가까이 그를 데려가고, 어떤 점에서는 욕망하는 것을 그에게 안겨주고, 그를 그의 상상력에 복종시키고, 그에게 욕망하는 것을 대령해 감각할 수 있게 하고, 그를 그의 정염에 따라 변화시키지요. 그러나 이 모든 마력은 그 대상 자체 앞에서 사라집니다. 이 대상을 그 소유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게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요. 누구도 자기가 보는 것을 머릿속에 상상하지는 않습니다. 향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공상은 사라지니까요. 망상의 나라는 이 세상에 깃들 가치가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인간적인 것들의 허무가 이와 같아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건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 루소

 

+271

"쥘리는 지난날의 정염, 생프리와 못 이룬 정염을 회상한다. 그와 함께할 행복을 희망하다가 희망 그 자체로 행복해진다. 꿈을 현실로 대체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으니까." 나탈리는 상상력의 권능을 말한다. "상상력은 순전히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보충해줄 수 있다." 그는 이런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쥘리나 루소 그 자신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가상의 만족이 위안을 주고 그 위안은 관능적 쾌락을 보충하고 대체하는 것이다." 희망이 희망하는 것을 대신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272

희망으로 희망하는 것을 대체한다는 생각은 진보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미래 세계를 환상으로라도 본다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그 세상을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진보주의를 삶의 방식으로만 말한다면 불행한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기다. 한 사람의 진보주의자가 미래의 삶을 선취하여 이 세상에서 벌써 행복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는 그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과 미래 세계의 건설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그의 존재는 이 불행한 세상에 점처럼 찍혀 있는 행복의 해방구와 같다.

 

+273

비평과 관찰의 시선이 닿지 않는 키스, 벌써 그 시선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키스는 어쩌면 저 소박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에서 다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때 추억은 추억이 아니라 희망과 그 기억에 붙이는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에서도, 어느 시간에서도 희망보다 더 강렬한 것도, 희망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것도 없다. 영화 속 연인들이 늘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키스의 시간은 얼마나 짧으며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다. 첫 키스가 날카로운 것도 그 때문이다.

 

+274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습자 시간에 오징어 먹을 가져오는 아이가 여럿이었다. 오징어 먹으로 쓴 글씨는 인간의 먹으로 쓴 글씨보다 더 반짝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오래 견디지 못했다. 여름날 아침 교실에 들어가보면 뒷벽에 붙여두었던 동무들의 작품에서 글씨는 간 곳 없고 습자지만 나풀거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검은 단백질이 변색하여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이지만, 어린 마음에 글씨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물으며 신비한 질문을 만들기도 했다. 나같이 섬 소년이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허공으로 사라지는 글자 앞에 오래 서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275

시인(장석남,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은 또한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자신을 새기려 하는데 그 방법이 특별하다. "꽃을 문질러 새기려"하고 "이웃의 남는 웃음을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한다. 가장 허약하거나 가장 가벼운 것들이 어떻게 가장 단단한 것에 저 자신의 위력을 남길 수 있을까. 시인은 시의 끝에 자신을 "그렇게라도 기릴 거야"라고 결심하는데, 오히려 그렇게밖에는 기릴 수 없을 것이라는 말로 읽는 게 옳겠다. 가장 섬세한 것에서 가장 강력한 얘기를 채집해온 것이 바로 시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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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의 품격을 알려주신 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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