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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라디오

 

마술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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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란 것이 요상해서 살 때는 내게 꼭 정말로 필요한 것 같단 말이야. 그것만 있으면 좀 더 완벽해질 것 같은 기분 있잖아. 쇼핑이 고민 해결사, 외로움의 치유사, 계절의 전령사, 권태로운 날의 활력소, 심심한 날의 친구였지. 각종 냄비, 각종 칼, 각종 프라이팬, 그릴, 약탕기, 요구르트 제조기, 두부 제조기, 나중엔 내가 평생 단 한 번도 쓸 일이 없는 야외 바비큐 조리 기구 세트를 샀어. 나는 야외를 싫어하거든, 나는 실내형 인간이야. 그 바비큐 조리 기구 세트 박스를 거실 한가운데 펼쳐놓고 생각했어. 내가 왜 쇼핑 중독증에 걸렸을까? 사실은 나는 누군가 우리 집 벨을 누르길 바랐던 거야. 누가 우리 집 현관과 거실에 들어오길 바랐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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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솔 밑에서 나는 생각했어. 나는 거부당했기 때문에 더 벗어나지 못했던 게 아닌가 하고. 거부가 곧 매혹인 거지. 부재가 매혹이지. 소유하려고 애씀이 곧 매혹이고. 나는 그녀를 소유하지 못했지만 더 슬픈 것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도 실패했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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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씨를 쓰는 예쁜 친구 엄마와 윤이 번쩍번쩍 나는 깨끗한 식기에 밥을 먹고 나서 우리 집에 가 우악스럽게 말을 하는 엄마와 얼굴을 마주하고 밥풀떼기 남아 있는 밥그릇에 물 떠 마시고 나면 천국에서 추방된 기분이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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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내게 갑자기 150만 원이 생겼어. 내가 정주영 장학금을 탄 건데 우리 부모님이 잠시 미쳤나? 난생 처음으로 통 크게 쏜 거야. '그 돈 니 해라.' 나는 레코드 가게에 가서 점원에게 말했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있는 판 한 장씩 전부 다 주세요.' 그 엘피판이 얼마나 많았던지 삼륜 용달차로 배달되었어. 문제는 엘피는 있는데 오디오가 없다는 거지. 며칠 뒤에 짠돌이 우리 아버지가 어디서 캔우드 중고 오디오를 구해 가지고 왔어. 그날 이후 엘피판을 끼고 살았어. 왜 그랬는지 잘 성명하지 못하겠어. 그냥 한 장 한 장 차근차근 들었어. 그냥 그렇게 하면서 사춘기와 청춘에 걸친 애매한 시기의 뜨거운 피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우수와 불안감을 달랬었을 수도 있지. 그 때 내가 배운 게 한 가지 있어. '알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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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삶은 뭔가? 내가 '언뜻' 본 '이상한 아름다움'이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전에 어떤 여인을 사랑했는데 그 이유가 뭔지 알아? 그녀의 집에 바둑판이 있었거든.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바둑판이 있는 거지. 나는 그녀랑 같이 바둑을 두고 싶었었어. 그 바둑판도 내가 언뜻 본 아름다움 중 하나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언뜻만 보여주는 거야.

 

+236

그런데요, 저한테는 참을 수 없는 게 또 있어요. 저는 혼자 있을 때 내 생각의 얕음에 가끔 어질어질해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열심히 들을 때, 혹은 열심히 책을 읽을 때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혼자 하는 제 생각은 가관이죠. 낮에 당한 모욕에 대한 반복적인 복수, 그때는 생각나지 않았는데 한참 뒤에야 생각나는 통쾌한 반박, 감상적인 소설에나 나올 법한 유치한 생각들. 그때는 내가 나를 할퀴죠. 오로지 나만이 나를 할퀼 수 있는 시간이 있지요. 내가 나의 적이죠. 그때는 무한히 표피적인, 무한히 얕은.... 그래서 저는 열심히 내가 들은 것, 내가 읽은 것을 생각해야 해요. 내 일상의 경험과 마음속, 그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게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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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자신의 삶을 살겠지만 잃어버린 것을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퍼하며 살게 될 것을 시인들은 알고 있었어. 

 

+238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이런 말을 했을 거야. 풀밭에서 초록을, 하늘에서 파랑을, 피에서 빨강을 취할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마법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그 힘을 써보고 싶어한다고. 마지막 잎새에서 희망을 볼 줄 아는 우리의 능력도 마찬가지겠지.

 

+239

그녀랑 이야기하는 순간은 마치 여기가 시장이 아니고 학교인 것 같아요. 그게 살아가는 것을 쉽게 해주진 않아요. 하지만 살아가는 것을 더 괜찮게 여기게 해줘요."

 

+240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한 말이 지금 생각나요. 아무도 감히 모든 힘을 다해 제 운명을 살지 못한다고. 우리는 어중간한 데서 멈춘다고. 일평생 내내 사랑과 이데아를 속여 손바닥 위에 놓인 저울의 이익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친다고. 우리는 너무나 몸을 사리기 때문에 시시한 사랑으로 상처 받고 평범한 욕망으로 괴로워하고 우리 자신의 모험을 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일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죠. 우리가 거울을 봐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서란 말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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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글을 읽노라면 모래사장에 들어가 파도를 발로 만지는 것 같다. 

잔잔한 파도가 발등을 간지럽히다가 갑자기 큰 파도가 되어 종아리까지 밀어닥쳐 깜짝 놀라게 되는.

명료하고 선언적인 화법이 아니라 파도처럼 천천히 적셔오다 어느새 우리를 덮쳐버린다.

삶과 사람에 대해 멀어졌다 다가갔다 하는 우리들의 마음처럼.

하지만 도시에만 머물던 사람이 꼭 바다를 찾아가야 하는 순간이 오듯.

그녀의 글이 우리를 계산과 강팍함에서 구원해서 삶과 사람 속으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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