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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밑줄]

 

 

+555

 

속이 후련했다. 병통을 알았으니 이제는 쉬 정복할 수 있게 된 셈이기 때문이었다. 모호한 것도 비물질적 대상도 아니게 된 셈이었다. 이름과 형태를 알게 되었으니 싸우기가 수월해진 셈이었다.

 

 

+556

 

-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 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557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558

 

-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 자유라는 거지!

 

 

+559

 

- 병신은 천국에 못 들어가요

 

 

+560

 

바다가 펼쳐지는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달려온 듯한 파도가 크레타 섬의 해안을 물어뜯고 있었다.

 

 

+561

 

-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엾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562

 

- 어느 날 나는 조그만 마을로 갔습니다. 갔더니 아흔을 넘긴 듯한 할아버지 한 분이 바삐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더군요.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아니, 할아버지 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시잖아요?> 그랬더니 허리가 꼬부라진 이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란다.> 내가 대꾸했죠. <저는 제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살고 있군요.> 자, 누가 맞을까요, 두목?

 

 

+563

 

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같은 봉우리에 이를 수도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은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부능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564

 

그 뒤로 나는 다시 여자를 생각해 본적은 없다. 그런데도 여자는 내 마음 깊은 속에서 살고 있었던 모양인가?

 

 

+565

 

- 좋아! 있으면 어디 크게 말해 봐! 입안에다 넣고 우물거리는 건 좋아하지 않는 성미야. 일하려면 일할 기분이 들어야 해. 안 그러면 술집으로 돌아가 버려!

 

 

+566

 

그는 난장판이 된 발칸 반도를 돌아다니며 늘 경이로 반짝이는 조그만 실눈으로 모든 것을 샅샅이 보고 온 사람이었다. 우리에게 버릇 들게 된 것들, 예사로 보아 넘기는 사실들도 조르바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567

 

-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568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

 

 

+569

 

- 두목, 당신은 말이오.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먹는 걸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소만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까마귀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 까마귀에게 일어난 일이라니, 그게 뭡니까, 조르바?

- 말씀드리지요.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 거지요. 그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어기적거릴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

 

 

+570

 

부드럽게 비가 내리는 시각에 그 비가 내부의 슬픔을 일깨운다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으로 즐거운 일인가! 그럴 때면 의식의 심연에 숨어 있던 쓰디쓴 추억, 친구와의 이별, 사라져 버린 여자의 미소, 날개를 잃고 다시 구더기가 되어 버린 나방의 (구더기는 내 심장으로 기어오르며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덧없는 희망 같은 쓰디쓴 추억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571

 

-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572

 

-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다.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반거충이:무엇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

 

 

+573

 

- 알렉시스, 내 너에게 비밀을 하나 일러 주마. 지금은 너무 어려 무슨 뜻인지 모를 테지만 자라면 알게 될 것이야. 잘 들어 둬라, 얘야. 천당의 일곱 품계도 이 땅의 일곱 품계도 하느님을 품기엔 넉넉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의 가슴은 하느님을 품기에 넉넉하지. 그러니 알렉시스, 조심해라. 내 너를 축복해서 말하거니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내면 못쓰느니라!

나는 묵묵히 조르바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입을 열면, 추상적인 생각이 사고의 정점에 이르고 이윽고 이야기가 되어 버릴 수 있다면! 그러나 위대한 시인 같은 사람이나 오랜 세월의 노력 끝에 그런 경지에 이르는 걸 어찌하랴.

 

 

+574

 

꺼져 가는 불가에 홀로 앉아 나는 조르바가 한 말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한 그런 말들이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 내 말은 종이로 만들어진 것들에 지나지 않앗다. 내 말들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것이었다. 말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말이 품고 있는 핏방울로 가늠될 수 있으리.

 

 

+575

 

웃으면서 말해요, 울면서 말해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 봐요,

눈 하나 깜빡하나?

 

 

+576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만났다가는 헤어지면서도 우리의 눈은 하릴없이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 모습, 몸매와 몸짓을 기억하려고 하니... 부질없어라, 몇 년만 흘러도 그 눈이 검었던지 푸르렀던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을.

 

 

+577

 

생전에 그가 마련해 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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