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Reading

옥상에서 만나요



[밑줄]



<웨딩드레서44>



+604


- 지난 한달 같은 날들이 이어지느니 여기서 멈추는 게 낫겠어.

남자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고 썩은 싱크대를 맨손으로 뜯어내며 사과했다.



+605


- 내 몸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야. 지금은 너보다 마음에 들거든?

2주 동안의 팽팽한 신경전 끝, 식장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자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멋진 타투였고 드레스와도 잘 어울렸다. 내 몸은 내 거야.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 몸은 내거야. 내 마음대로 할 거고 다들 보라고 해.



+606


여덟번째 여자는 칼럼니스트였다. 여자는 결혼해서 사는 삶에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때 혼잣말을 했다.

- 이제 환멸에 대해서는, 웬만큼 쓸 수 있겠군.



+607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608


- 언니, 결혼생활은 어때요?

- 굴욕적이야


-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609


- 어머 임신한 거야?

엠파이어 라인인 원피스를 입었을 뿐인데 거래처 사람이 물어왔다. 결혼하고 해를 넘기자, 여자는 그런 질문들을 자주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선을 넘는지 새삼 놀라웠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가깝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 매번 참았다.



+610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 게 많았다.

-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611


여자의 친척이 성당에서 하는 예비부부 수업을 추천했고, 곧이어 남자의 친척이 절에서 하는 수업을 추천했다. 종교가 없는 여자는 당황스러웠다.

- 네? 결혼을 절대 안하실 분들이 결혼에 대해 하는 말을 들으러 가라고요?



+612


어릴 때부터 성실했던 서른네번째 여자는 결혼 적령기에 곁에 있던 사람과 쫓기는 마음으로 결혼했다. 몇년이 지나고서야 이 숙제는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가 아니었을까, 의문이 찾아왔다.



+613


결혼을 통해 스스로에게 관습에 순응하는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한 여자는, 자주 '이것이 관습일 뿐인가?' 검토하는 사람이 되었다. 의미를 두지 않는 행동은 되도록 하지 않는 사람이.



<효진>


+614


나머지 하나는 아빠가 그렇게 무시하는 타 지역에서 서울로 몰려든, 포장지가 다르고 알맹이가 다른 남자애들을 모조리 만나보는 것이었어. 만나보고 맛보기. 나는 그렇게 팔도 컬렉터가 되었고, 너는 계획적이었던건 아니지만 경험 없는 남자애들만 계속 만나서 체리 컬렉터가 되었으니 우린 정말 딱 맞는 콤비였다고 생각해.



<알다시피, 은열>


+615


언젠가 또 굉장한 이야기가,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이야기가 안테나에 걸려 나를 사로잡는다 해도 환태평양이 내 편인 이상 문제없다. 논문이 되지 않으면 노래라도, 농담이라도 된다는 것을 아는 이상 괜찮다. 그래서 언제나, 알다시피 밴드입니다.



<옥상에서 만나요>


+616


나는 오버핏 재킷이 잘 어울리는 독립적인 현대 여성인데 왜 이딴 걸 거들떠보고 있나 하고.



+617


누군가 나를 키보드 청소하듯 해체해서 먼지를 털고 다시 조립한 것 같았다니까.



<영원히 77 사이즈>


+618


남자는 돌아오고 나서 3일을 내리 잤고, 그다음 이틀은 친구들과 회포를 풀었다. 여자의 순서는 그제야 왔지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짝사랑은 모멸감을 잘 견디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해피 쿠키 이어>


+619


뇌세포를 몇백개쯤 죽이고 나서 대답했더니 그 교수는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실망 정도는 조금 숨겨줬으면 했지만 교수쯤 되면 어떤 감정도 숨길 줄 모르게 되는 듯 했다.



<이혼 세일>


+620


- 너무 걱정하지 마. 아영이가 다큐멘터리 보고 말해줬는데, 인간의 뇌는 스물다섯에서 서른 무렵에 완성된대. 그러니까 애들 성격은 계속 변할 거야. 이대로 고정되지 않을 거야. 너는 게다가 보기 드물게 일관적인 양육자니까.



+621


- 나도 얼마 전에 가슴에 뭐가 잡혀서 맘모톰 했는데, 야, 그거 진짜 드릴이더라

성린이 자기 경험을 보탰다.

- 무섭지 않니? 우리를 죽일지도 모르는 것들이 우리 몸에서 돋아나고 있어. 종유동굴이라도 된 기분이댜. 의사자 이제 치즈, 바나나, 초콜릿, 아보카도를 먹지 말래.



+622


-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 Read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을 쓰고 싶다면 The Art of Fiction  (0) 2019.02.11
사물의 중력  (0) 2019.02.09
인간실격  (0) 2019.02.07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0) 2019.02.07
그리스인 조르바  (0) 2019.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