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Reading

사물의 중력

[밑줄]

 

+623

그는 어린 시절 만년필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다 커서도 호텔에 가면 책상에 놓인 볼펜을 꼭 집어왔다고 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 이제 내가 돈 주고 살 수도 있잖아?

그때부터 그는 만년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게 어른이 되어 돈을 번다는 것의 의미다

 

+624

물건과의 의리 따위로는 물욕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625

일일이 예측하고 대응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포기하고 대강 몸으로 때우고 살면 껴안고 살 물건이 대폭 줄어든다. 홀가분한 삶을 위해서는 '견딜 때까지는 견뎌본다'는 자세도 필요하다.

 

+626

그런데 음식 맛도 먹어본 놈이 알고 옷도 입어본 놈이 안다고, 경험 없이 산 가방은 내게 그리 유용하지 않았다. 두툼한 통가죽으로 만든 서류 가방 스타일의 갈색 토트백이었는데, 들고 나갈 때마다 혹시 잃어버린 홈트레이닝용 아령이 그 안에 처박혀 있나 확인할 정도로 무거웠다

 

+627

혼자 있을 때도 라면을 냄비에서 국그릇으로 옮겨 담고 김치를 접시에 덜어 먹는 일, 그런 게 바로 자신을 존중하는 방법이란 걸 알았다

 

+628

15라운드까지 가는 연장전 끝에 판정패한 복싱 선수처럼 뻐근한 몸과 비참한 기분으로 집에 굴러 들어오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껴안기듯 좁고 따뜻하고 안전하고 지극히 사적인 공간. 누군가 집에 있어서 보일러를 켜두고 이부자리를 데워두고 따뜻한 저녁 식사와 차를 내준다는 건 돈을 많이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한테나 가능한 일이다. 나 같은 싱글에게는 거위, 오직 거위뿐이다.

 

+629

그러다 보면 물건을 향한 호기심과 열망은 점점 강해진다. 그것만 있으면 삶이 엄청나게 생산적으로 혹은 창의적으로 바뀔 것 같고, 그걸로 할 수 있는 백만 가지 재미난 일들이 떠오른다. 결국 마감이 끝날 즈음 주문을 하는데, 택배를 받고 세 시간 정도가 지나면 호시김과 열망은 깡그리 사라진다. '금일 배송'이라는 택배사의 메시지를 받고 '응,? 내가 또 뭘 샀지?' 의아할 때도 많다. 그건 현실 도피로서의 소비였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코앞까지 다가와 내 목을 조르려 덤비는 좀비 때와도 같은 일과 스트레스를 무찌르기 위해 신용카드를 몽둥이 삼아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630

과학자들은 쇼핑에서 얻는 쾌감이 오르가슴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스트레스를 받으면 작은 립스틱 하나라도 사려는 심정을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동료들에겐 저마다의 '립스팁'이 있었다.

 

+631

내가 한때 사랑했고 여전히 가치 있지만 내게는 필요 없어진 물건이 다른 누군가에게 행운의 선물이 되어 다시 사랑받는 것. 그거야말로 내가 중고거래를 좋아하는 결정적 이유다. 단지 물건을 처분하고 싶다면 고물상을 물러 한 방에 보내는 게 간단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물건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 모든 물건에는 그것을 설계하고 만든 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것이 쉽게 버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그때 나는 오랜 친구들과 공들여서 긴 이별을 하고 있었다.

 

+632

물론 취향에는 경험치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프릴 달린 총천연색 꽃무늬 이불과 북유럽 스타일의 기하학 문양이 그려진 린넨 침구의 경우처럼, 많은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이게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미감의 우열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고도로 정제된 취향을 '감각'이라 부른다. 감각의 단계까지 가면 인간은 잔인해진다. 가차 없이 서로를 평가하고 헐뜯는다.

 

+633

하지만 이제 나는 내 엉덩이 정도는 스스로 닦을 줄 아는 어른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

 

+634

서울은 자전거 타기에 그리 좋은 도시가 아니다. 대문만 나서면 바로 찻길이라 단지 인도가 있다는 이유로 가로수길이니 서촌이니 하는 동네가 트렌디한 나들이 코스가 되고 땅값이 폭주했을 정도다. 문화 자원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 부차적인 이유다. 걸을 때 저도 몰래 마음이 편하고 찬찬히 둘러볼 여유가 생기는 곳이라야 사람이 몰려든다. 잘 닦인 보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서울에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자전거를 탄다는 건 어지간해선 엄두를 내기 힘들다.

 

+635

꼭 아끼는 물건이 아니어도, 돈을 좀 들였거나 아직 제 구실을 하는 물건을 처분할 때는 골치가 아프다. 끼고 살자니 공간이 부족하고, 버리기는 죄스럽고, 누굴 주자니 아깝고, 파는 건 귀찮다. 이럴 때 최선은 나보다 그 물건을 아껴줄 사람, 내가 그 물건보다 아끼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636

취향이 없다는 건 딱히 자랑할 일은 못 된다. 그나마 '물건으로 나를 표현한다'는 개념이 발전하다 못해 이제는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을 위해 헌신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먹고 입는가'만이 인간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인 양 감각 자랑에 몰두하는 공허한 영혼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라, 무취향도 더러 개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637

한 선배는 재활용 쓰레기를 배출할 때마다 숨이 막혀 공황장애가 올 것 같다고 했다. 내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만 이 정도인데 온 인류가 하루에 배출하는 쓰레기를 한데 모으면 얼마나 될까. 그 많은 쓰레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것들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이 소비되고 이것들을 폐기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환경이 오염될 것인가. 이런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진다는 거다. 그의 공간은 유학생의 장기 임대아파트처럼 단출하다. 공간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그가 지키는 원칙은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린다'는 것이다.

 

+638

결혼 후 집에 놀러 온 언니가 방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 침대가 싱글이라니, 사이즈 이름부터가 불길해. 그래서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대답했다

-그거 싱글 아니야. 슈퍼 싱글이야

- 더 불길해

 

+639

그의 눈에선 '내 오늘 세일즈맨 인생의 명운을 걸고 반드시 너에게 이 물건을 팔고 말겠다'는 집념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내가 하루만 생각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하자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강요가 아니라 좋은 물건을 몰라준다는 억울함, 답답함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배우들 기사를 10년 넘게 쓰고도 연기를 보는 눈이 없었거나. 사실은 그 태도 때문에 구매했다.

 

+640

세일즈맨의 혼이 담긴 문제의 독립 스프링 라텍스 매트리스는 친구에게 팔았다. 참고로 그 침대는 퀸 사이즈였다. 퀸 사이즈를 쓴다고 퀸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그러니 내가 싱들로 지낸 게 싱글 사이즈 침대 때문도 아니었을 거다.

 

+641

눈 오는 이밤,

세상의 엄마들 다음으로 아름다운 당신과

사랑의 맞담배를 피워요.

당신이 이혼녀라 할지라도 난 좋아요.

가진 게 에이즈뿐이라도 문제없어요.

그게 나의 마음.

당신이 진심으로 원한다면

담배뿐 아니라 락앤롤도 끊겠어요.

15번 버스 타고 특수용접 학원에도

지하철 타고 대학입시 학원에도 다닐 거예요.

그대가 날 사랑해준다면.

- 김일두의 <문제없어요> 중에서

 

+642

- 나도 살래요!

- 나도 나도!

나는 진땀이 났다

- 저기, 여러분 진정하세요. 내가 효과를 검증해본 뒤에...

- 아, 됐습니다! 그냥 주문할게요!

내가 웬만하면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데 그 순간 속으로 그랬다

'뭐지, 이 멍청이들은?'

1년 반 뒤 회사를 나올 때 나와 그 멍청이들의 책상에는 한 두 숟가락 퍼먹고 남은 코코넛 오일이 고스란히 한 병씩 놓여 있었다.

 

+643

- 누가 물건 얘기를 하는데 듣자마자 '나도 살래'하는 건 '나 너 믿어', '나 너 좋아'라는 뜻이야. 더구나 별로 비싸지도 않은 것들이잖아

10원 단위까지 가계부에 기록하는 생활을 오래 해온 나는 동조 소비로 우정을 표현해본 적이 거의 없지만 듣고 보니 설득력이 있었다. 인간이란 의외로 사랑스러운 면이 있는 동물이다.

 

+644

인생을 트렁크 하나에 담을 수 있다면

 

+645

취직해서 스스로 돈을 벌기 전까지 쇼핑이란 나 자신의 가난을 일깨우는 잔혹한 체벌 같은 거였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학비와 고정 생활비로 쓰기에도 빠듯했다. 운동화 한 켤레를 살 때도 '샀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정말 이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구두를 사는 게 낫나? 이걸로 내 모든 옷과 매치할 수 있을까?' 백 번을 고민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내겐 실패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우울해지곤 했다.

 

+646

아마도 이제 히피란 프렌치 시크니,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니, 킨포크 라이프니 하는 것들처럼 계절 따라 기분 따라 삶을 장식하기 위해 갖다 붙이는 레이블이 된 모양이다.

 

+647

빨간 서스펜션을 달겠다는 등 도색을 한다는 둥 한동안 호들갑을 떨었지만 물건의 원형을 건드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결국 눈을 적응시키는 편을 택했다.

 

+648

우리에게는 많은 물건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어떤 물건은 분명 우리의 삶을 더 좋은 곳으로 이끌어준다.

'+ Read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택의 조건  (0) 2019.05.10
소설을 쓰고 싶다면 The Art of Fiction  (0) 2019.02.11
옥상에서 만나요  (0) 2019.02.07
인간실격  (0) 2019.02.07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0) 2019.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