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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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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

 

집은 어렵다. 설계하기도 짓기도 어렵다. 그리고 살짝 귀뜀하거니와 살기도 어렵다. 집은 바지런한 자들에게 맞는 주거 유형이다. 아파트는 나태한 자들에게도 생존을 보장해준다. 오히려 나태를 적극적으로 권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편함을 근면으로 기꺼이 극복하고 그 가치를 음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집을 짓겠다고 나선다. 

 

 

+883

 

건축가로서 집을 짓는 일은 곧 거기 살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이다. 사람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라고 했다. 집 짓기가 어려운 이유는 거주자들의 삶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는 작은 집일수록 더 그렇다. 집은 크기는 작아도 사람 사는 건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넣어야 한다. 짓는 데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여기에 모든 것을 거는 건축주의 기대 수준은 높고 요구는 까다롭다. 그런데 예산은 부족하다. 

 

 

+884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다"

 

멋진 말이다. 음악이 추상적 구조체라면 건물은 물리적 구조체다. 그런 점에서 건축은 얼어붙어 있고 음악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이때 건축가는 작곡가에, 현장 소장은 지휘자에 가깝다.

 

 

+885

 

사실 건물 앉히기에 가장 곤란한 곳이 바로 평평하고 네모난 땅이다. 신도시에서 분양하는 택지들이 대개 그렇다. 아무리 둘러봐도 다 똑같이 생긴 땅이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물이라면 맹물이고 종이라면 백지다. 자연이 만든 우아한 경사지를 기필코 쑹덩쑹덩 잘라 야만적 옹벽을 앞뒤로 세우고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 한국 택지 개발의 정의인 듯도 하다. 이런 땅 위에 건물을 얹어야 할 때가 가장 당혹스럽다. 좋은 답은 훌륭한 질문에서 나오는 법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인 건 그 절묘한 질문 때문이다. 그런데 평평하고 네모난 땅은 입을 굳게 닫고 있다. 필사적으로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다. 초면의 과묵한 상대는 얼마나 불편한 존재겠는가. 그에 비해 이렇게 경사 급하고 이상한 땅은 수다스럽게 많은 질문을 쏟아내는 중이다. 이런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궁금해하는 것이다.

 

 

+886

 

도시는 무엇일까. 도시는 왜 생겼을까. '도시는 잉여의 결과'라고 진단하는 학자도 있다. 내 판단은 다르다. 인간은 잉여 소모가 아니고 소유 교환을 위해 도시를 만들었다. 인간은 잉여가 부족할 때에도 소유를 교환했다. 이동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 도시가 필요했다. 혹은 그 결과가 도시다. 

 

 

+887

 

가족은 균질한 인격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뚜렷한 위계를 지닌 구성원들이 모여 이룬 작은 사회 체계다. 이것이 전제다. 구성원들은 자신의 위계에 따라 공간을 달리 점유한다. "자신의 집에서 가족 구성원의 권력 관계가 어떻게 공간의 점유로 표현되는지 분석해서 제출하시오."

 

 

+888

 

자신의 집에서 본인의 눈으로 보아라. 멍하게 보지 말고 꼼꼼히 살펴라. 현관의 신발과 화장실의 칫솔도 뭔가를 이야기할 것이다. 보려 해야 보이고 들으려 해야 들린다. 그간 여러분의 눈은 장식품이거나 기껏해야 감각기관이었다. 이 관찰 연습으로 여러분의 눈이 분석과 판단 기관으로 바뀔 것이다. 여러분은 양서류에서 인간으로 진화할 것이다. 서술 조건도 요구한다. 과제 보고서가 무엇인지 생각해라. 앞으로 여러분이 어딘가에 제출할 보고서는 본인이 없는 데에서 본인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도구다.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써라. 그는 지금 비슷한 문서를 100개 넘게 읽어야 한다. 한가하지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 구차하게 설명하지 말고 단호하게 과시하라. 간단하고 명료하게 주장해라. 문장을 배설하지 마라. 깔끔하게 정리해라. 읽는 자의 눈에 귀에 쏙 넣어줘라. 제출 조건은 까다롭다. 맞춤법이 틀려도, 문장이 비문이어도, 페이지 레이아웃이 깔끔하지 않아도, 표지가 없어도 모두 감점이다. 스테이플러로 무신경하게 찍어 제출해도, 재활용이 어려운 비닐 커버로 덮어도 안 된다. 

 

 

+889

 

가끔 미술 전시장에서 만나는 이상한 제목이 있다. 무제. 제목이 없다는 것도 제목이다. 무제도 제목이라고 붙이는 이유는 그것이 없으면 지칭하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이라고 했다.

 

 

+890

 

시공 현장은 문제투성이다. 항상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시공자를 건축가가 추천하면 문제가 생겼을 때 건축가가 객관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건축가는 시공 현장에서 견제와 감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감리다. 

 

 

+891

 

그런데 좀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창이 수평선을 제대로 담기 위해서는 눈높이가 확인되어야 한다. 창이 낮다면 지저분한 동네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창이 키에 비해 높다면 하늘만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부부의 키가 달랐다. 누구의 키에 맞춰야 하다. 선택해야 한다. 어느 한 사람은 지저분한 풍경이 포함된 수평선을 보거나 수평선이 없는 하늘을 봐야 한다. 지저분한 풍경을 배제하기로 햇다. 남편의 키에 맞춰 창 높이가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사실 쉽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주겠지만 사실 내가 차별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던 사안이다.

 

 

+892

 

그러던 중 현장에서 뜬금없이 연락이 왔다. 건축주가 마당에 욕조를 놓고 싶어하는 눈치라는 것이다. 현장 소장은 완곡하게 전달했지만 건축주가 현장 소장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의지는 있는 것이다. 의지의 강도가 문제였다.

 

 

+893

 

학교 다닐 때 음대 후배가 불평한 적이 있다. 연주회에서 청중들이 박수에 인색하다는 것이다. 치열하게 연습하고 공들여 연주해도 청중들은 그렇게 미지근한 박수를 보낸다는 이야기였다. 내 대답이 아직 기억에 있다. 자신이 지은 집에 대해 한 번도 박수를 받아보지 못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음을 잊지 말라고.

 

 

+894

 

종종 진학 상담을 한다. 건축을 하겠다는 고등학생과 그 부모들이 묻곤 한다. 나는 훌륭한 선택이니 주저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도시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을 수 있는 직업이 얼마나 멋지냐고. 그 길이 어렵고 거친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나중에 생각이 바뀌어 굳이 건축가의 길을 걷지 않더라도 건축은 가장 훌륭한 교육이라고, 나는 믿는다. 건축을 해도 되느냐는 질문도 받는다. 힘들고 전망도 좋지 않다더라는 말이 따라온다. 나는 어서 다른 전공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건축은 그렇게 눈치로 선택할 공부가 아니다. 그렇게 편하게 먹고사는 게 목적이라면 건축이 아니라 어떤 일을 선택해도 후회한다. 사실 이건 세상에서 나만 아는 비밀이긴 한데 그런 직업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895

 

나는 유학 생활을 통해 내게 배당된 햄버거와 피자는 다 먹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내가 써야 할 책도 이미 다 썼다고 이야기해왔다. 그런데도 내게 햄버거와 피자를 강권하는 자리가 가끔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책을 낸다. 이 건물의 가치를 동의받거나 요구할 생각으로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나고 선택한 사람들과 어떻게 작업했는지 기록하여 공유할 따름이다. 어딘가 한 줌의 가치라도 있다면 독자들이 그 부분만 뽑아 간직하길 바란다. 그것이 독자에게 보내는 내 선물일 것이다. 나는 거기 이 책의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 나머지는 훌훌 던져버리시기를. 선물을 받고 포장지는 미련 없이 구겨버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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