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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896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897

 

안 그래도 비참한데 뻔하기까지 한 건 싫었다. 그냥 그때는 이렇게 힘들어도 티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어른다운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그 기분이, 세상에서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어렸다. 매우 어렸다. 빈 주머니에 그런 쓸데없는 똥자존심이라도 욱여넣어야 할 정도로. '감춤'으로써 그것은 나만 아는 은밀한 성장처럼 느껴졌다. 

 

 

+898

 

들어봤지만 들어본 적 없는 소리. 술이었다. 주류 코너에 즐비하게 놓인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배의 엔진이 만들어내는 동요에 따라 흔들리며 좌우앞뒤에 놓인 술병들과 살짝살짝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배 전체에 흘러넘치는 흥청망청한 술기운의 비밀 하나를 찾은 것만 같았다. 수많은 술병들의 노래가 엠비언스로 깔려 있는 공간인데 당연하지. 기어이 귀까지 술로 흠뻑 적셔주었던 배. 다음에 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여행을 간다면 무조건 이 배를 타고 국경을 넘으리라 다짐했다. 역시 술배는 따로 있다.

 

 

+899

 

사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비슷하다는 건, 이미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하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을 유머의 소재로 고르는지 혹은 고르지 않는지(후자가 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걸 그려내는 방식의 기저에 깔린 정서가 무엇인지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

 

 

+900

 

가구와 세간살이들이 하나씩 지상으로 올라갈 때마다 마음은 계속 내려앉아 지하에 고였다. 집이 '집'에서 '공간'으로 바뀌어가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우뚝 섰을 때

 

 

+901

 

동전 하나도 허투루 쓸 수 없었던 그 시절에 T가 유일하게 부리던 사치이자 위안이었던 소주들을 시원하게 내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T가 있기까지 냉장고의 그 냉기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는지.

 

 

+902

 

걷기는 많은 것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리베카 솔닛도 말했다.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야 한다고. 걷는 것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라고. 소요학파들은 늘 느리게 걸으면서 토론했고, 소설의 영감을 야간 산책에서 얻곤 하던 찰스 디킨스는 친구에게 "걷는 동안 머릿속으로 쓰면서 웃음을 터뜨리다가, 흐느끼다가, 또 흐느꼈다네"라고 말했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은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멋진 무기가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고

 

 

+903

 

세상에는 뭘 하든 어딘가 어색한 사람이 있는데, 욕만 하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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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하기에 딱 좋은 취기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이쯤에서 욕을 한 번 내리꽂으면 분위기 끝장나겠다 싶은 순간이. 이것저것 섞어도 통 '그 맛'이 안 나던 떡볶이의 간을 단박에 맞췄던 라면수프처럼, 욕 한 방이 지금 오고 가는 대화의 간을 딱 맞출 게 분명한 순간이. 말하자면 씨발의 스팟. 

 

 

+905

 

"야 그 정도면 됐어. 사실 욕이란 게 연습한다고 늘겠냐. 술 마신다고 늘겠냐. 그냥 사는 게 씨발스러우면 돼. 그러면 저절로 잘돼."  이상하게도 이 말과 이 장면은 오랜 세월 내 기억 속에 깊이 박히게 된다. 말을 맺고 느릿느릿 청하를 따르는 P의 모습이 소스라치게 쓸쓸해 보여서 굳이 병을 빼앗아 내가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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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처음으로 취향의 확장과 감당의 깜냥에 관해 생각했다. 그동안 돈이 많이 나가는 취향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데다가, 취향이라는 것은 경험, 사유, 지식, 능력, 근육량과 더불어 함께 확장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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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만 먹으면 막걸리 남잖아요. 한 병엔 두 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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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우리를 조금씩 허술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래서 평소라면 잘 하지 못했을 말을 술술 하는 순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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