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Reading

어린이라는 세계

[밑줄]

 

+1675

어린이는 누군가의 자녀이고 학생이지만 각자가 우리 세계의 어엿한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걸 잘 알면서.

 

+1676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아는 것이 저의 큰 영광입니다

 

+1677

이날 현성이가 어머니를 보자마자 한 말은 이랬다. "엄마, 이거 왼쪽은 내가 묶은 거야!"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를 만나면서 얻는 좋은 점이 많다. 그중 하나는 왼쪽 신발 끈을 혼자 묶은 현성이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1678

"보통은 '무엇을 하지 말자'보다 '무엇을 하자'고 하는 게 남을 설득할 때 더 좋은 말이야. 예지가 관심 있는 환경 운동으로 생각해 보면, '종이컵을 쓰지 말자'보다 '개인 컵을 가지고 다니자'가 더 효과적인 것처럼." 그러면서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____자"라고 썼다. 내심 '존중하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지의 답을 기다렸는데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예지야, 그럴 때 '무시'의 반대말을 떠올려 보면 좋아." "아! 알았다!" 유일한 답이라는 듯, 예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1679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내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1680

몬테소리는 '재미있는 수업'이라고 생각해 손수건 사용법 등을 가르쳤는데, 어린이들은 전혀 웃지 않고 귀 기울여 수업을 들었을 뿐 아니라 수업이 끝나고는 깜짝 놀랄 만큼 열광적인 박수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몬테소리는 어쩌면 자신이 "어린이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린이들은 더러운 코 때문에 끊임없이 야단맞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제대로 코 푸는 방법을 몰라 애를 먹어 온 것이다. 어린이라고 해서 코를 훌쩍이며 지저분한 모습으로 다니고 싶을 리 없었을 테니, 배움의 기회가 너무나 소중했으리라는 이야기였다. 이 귀엽고 애틋한 일화에는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다. 어린이도 사회생활을 하고 있으며, 품위를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1681

좋은 친구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기웃거리는 요즘이다.

 

+1682

몇 달에 걸쳐 끝내 책을 다 읽었을 때 자람이는 손을 배에 모으고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1683

자람이가 가고 보니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엔 제 마음이 있어요."

 

+1684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1685

원고를 끝낸 다음에는 거의 날마다 학원에 가서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쳤다. 내가 듣기에도 어찌나 못 치는지, 아래층 세탁소와 부동산 사장님께 너무 죄송스러웠다. 지금 온 동네에 이 소음을 일으키는 게 누구인지 들키지 않으려고 학원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른 출입구를 이용하기도 했다.

 

+1686

나는 그길로 돌아서서 집으로 왔다. 비를 조금 맞았지만 어린이는 덜 불안했을 것 같고, 나는 어린이가 젖은 것이 안쓰러웠지만 조금 뿌듯했다. 거짓말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무 좋아서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1687

동화 <에밀과 탐정들>에는 내가 꼭 닮고 싶은 어른이 나온다. 바로 작가 자신이 분한 캐스트너 기자다. 에밀과 친구들이 대단한 모험 끝에 도둑을 잡았을 때 캐스트너는 취재기자로 등장한다. 거기서 그는 에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이 사건에 자신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에밀이 기차에서 돈을 도둑맞는 바람에 표 값을 낼 수 없었을 때 지나가던 신사가 돈을 대신 내주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캐스트너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에밀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캐스트너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 좋다. 아예 에밀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어린이에게 베푼 작은 호의, 이미 잊어버린 호의 덕분에 어린이에게는 모험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는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이야기 속의 일인데도 나는 못 견디게 캐스트너가 부럽다. 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부럽기는 해도 따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만큼 멋있는 어른이 되려면 친절을 베풀고 잊어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럴 자신은 없다. 나는 속이 좁아서 그렇게는 못 할 것이다. 그보다는 소나기 때문에 생긴 그 일을, 우산을 같이 썼던 침착한 어린이를 떠올리면서 한 번씩 그때의 기분을 되새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목에서 또 이상한 소리가 난다.

 

+1688

한 명은 작아도 한 명

 

+1689

'얌전한 어린이'를 선별해서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자체가 혐오이고 차별이라는 데에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한 걸까? 돈을 내고 사용하는 공간에서조차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 차별인가. 

 

+1690

사회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주지 않겠다고, 벌주듯이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사회가 자격이 있으면 상으로 아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애초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그 끝이 결국 아이를 향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미래에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괜찮을까? 미래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되는 셈이다.

 

+1691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우리 중 누가 언제 약자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힘을 합쳐야 한다. 나는 그것이 결국 개인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1692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큰 오해다.

 

+1693

내전이 끊이지 않는 시리아의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이가 찍은 영상을 보았다. 바깥에서 폭탄이 터질 때마다 아버지와 아이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아버지는 아이가 겁을 먹을까 봐 공습이 벌어지는 상황을 이용해 놀이를 만들었다고 했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화면 밖의 내게도 무섭게 들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가 없는 것처럼 폭소를 터뜨린다. 아이는 정말 공습이 놀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여전히 무섭지만, 아버지를 믿고 기꺼이 오해하기로 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어린이는 아버지의 사랑만은 조금도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복잡한 얘기가 아니다. 세상에는 어린이를 울리는 어른과 어린이를 웃게 하는 어른이 있다. 어느 쪽이 좋은 어른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1694

어린이의 직관은 무엇을 꿰뚫어 보는 신통한 능력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대로 보는 힘이다.

 

+1695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이니 뭐니 하는 말도 자제하면 좋겠다.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살아 있다. 나라의 앞날은 둘째치고 나라의 오늘부터 어른들이 잘 짊어집시다.

 

+1696

글쓰기도 수영처럼 연습이 필요한 거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돼. 글은 자기만을 위해서 쓸 수도 있어. 그러면 내 생각을 내가 읽을 수 있거든. 너무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써도 돼. 오늘 쓰고 내일 읽어도 돼.

 

+1697

내가 제일 부러워한 건 '곱게 자라서 맺힌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상적인 어린 시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내가 갖지 못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 인생이 일찌감치 모양 잡힌 것 같아서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다.

 

+1698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다. 일의 결과가 생각만큼 좋지 않을 때 괜찮다고, 과정에서 얻는 것이 많다고 나를 달랜다. 뭔가를 이루었을 때는 마음껏 축하하고 격려한다. 반성과 자책을 구분하려고,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 덕분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잘 돌보게 되었다.

 

 

'+ Read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부란 무엇인가  (0) 2022.08.26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1) 2022.07.25
우연한 걸작  (0) 2022.04.22
두려움 가득한 작업실에서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The Patch  (0) 2022.04.07
행복의 충격  (0) 2022.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