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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밑줄]

 

+1755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1756

사상가 폴 비릴리오는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명이며 선박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생의 발명은 고단함의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1757

삶이 쉽지 않은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1758

자기 아닌 것을 너무 갈망하다 보면 자기가 소진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자신이 왜소해진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은 탁월한 무언가가 되고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땐 정녕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삶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데 있다. 

 

+1759

정치 공동체는 자연의 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 우연이 아니라 본성상 정치 공동체가 없어도 되는 존재는 인간 이상이거나 인간 이하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중

 

+1760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서 담백하게 욕심이 없는 상태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앞서 존재했던 위대한 군주들은 사람들이 귀찮아하고 해이해지고 물러나기만 할 뿐, 나아가려 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 아름답게 수와 문양을 놓은 옷으로써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타악기, 현악기, 관악기 등으로써 사람들의 귀를 유혹하고, 관직과 편의로써 사람들의 몸을 유도하고, 두드러지는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영탄함으로써 사람들의 기개를 인도하였다. - 박지원, <명론> 중

 

+1761

세상은 악업과 고통으로 가득하고, 삶은 존종 불쾌하다. 계속 살아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로베르트 무질이 그랬던가, 삶은 불쾌하므로, 담배를 피워야 견딜 수 있다고. 비흡연자들도 희망이라는 이름의 구름과자가 없으면 삶을 견디기 어렵다. 흡연자들이 주기적으로 담배 연기를 삼키듯이, 비흡연자들도 간헐적으로 희망이라는 구름을 삼킨다. 스스로 삼킨 희망에 기대어 사람들은 또 하루를 살아간다. 희망이라는 허구가 없었다면 오늘도 또 하루가 갔다는 평범한 우울감을 견디지 못했을지 모른다.

 

+1762

상황은 충실히 반영하기보다는 외부적인 틀에 맞추어 상황이 재단되는 일은 개인의 마음 차원뿐 아니라 국가의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짜꾼은 <지도에서 태어난 태국>이라는 저서에서 원래 명확한 국경과 영토주권 없이 개인적 충성 관계에 기초하여 질서를 유지하던 시암(Siam)이 분명한 국경과 단일한 주권이 있는 태국으로 거듭난 것은 서양의 '근대적' 지도 제작 기술 때문이었음을 보여준 바 있다. 즉 당시의 여러 필요에 의해 이른바 근대적 지도를 제작해야 했는데, 그 지도는 명확한 국경을 필요로 했고, 그 결과 전에 없던 국경이 그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지도는 당신에 존재하던 태국의 모습을 모사하거나 반영한 것이 아니라 지도 제작의 요구에 따라 태국이 결정된 것이다. '근대적' 지도 제작이 태국을 만든 것이지, 태국이 지도를 만든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민심이 설문을 만든 게 아니라 설문지가 민심을 만들었다고 할 만한 경우가 적지 않다.

 

+1763

탈정치적 삶의 태도로 일관하며 숯불갈비만 먹다가 늙어 죽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키스를 할 수 있는 입술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단 한 번도 키스하지 않은 채 늙어 죽는 것과 같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인간은 타고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끝내 온전해지지 않는다. 마음에는 언제나 공터가 남아 정치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비계가 있어야 삼겹살이 완전해지듯, 정치가 있어야 삶이 완전해진다.

 

+1764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 풍경이 바뀌었다

 

+1765

2020년 1월 3일 미군이 바그다드에서 드론을 이용해 이란 특수부대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살해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공습이 진행되는 동안 지인들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고 언론은 전했다. 이 언론 기사 역시 교차편집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살육을 전한다. 성당의 세례식과 난폭한 총질이 교차편집되었던 것처럼, 아랍권 성지 바그다드에서의 살해 장면과 패권국 수도 워싱턴에서의 아이스크림 장면이 갈마든다. 누런 흙 위에 뿌려졌을 붉은 피, 그리고 붉은 혀 위에서 녹았을 하얀 아이스크림.

 

+1766

이 비극을 끝내는 것이 바로 재앙신으로부터 상처 입은 아시타카,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아 인간을 저주하게 된 모노노케 히메라는 점은 상처 입은 이들에게 용기를 줄지도 모른다. 그것은 상처받은 인간만이, 자신을 넘어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767

성행위에 비해 피임은 종종 보다 주체적인 선택이다. 피임이 하나의 선택지가 되면서 재생산도 선택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태어나는 일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태어나 이 세상의 무대에 올라가는 것은 출생자의 의지와 무관하다. 마치 고깃집 불판 위에 올라가는 일이 삼겹살의 동의 여부와 무관한 것처럼. 인간은 '낳음을 당해서' 살아나간다.

 

+1768

한때 그런 선택이 원천 봉쇄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에는 자식이 없으면 안정된 노후를 기대할 수 없고, 친족집단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몰렸으며, 자신의 유한한 삶에 영생의 환상을 부여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러한 시절에 자식이 없으리라(무후無後)는 것은 최대의 저주가 된다.

 

+1769

<더러운 잠>이 차용한 마네의 <올랭피아>는 여성 누드가 단순한 관음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회화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었다. <올랭피아> 속에서 벌거벗은 '백인' 여성은 관람자의 관음적 시선을 무력화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그 옆에서 이주 노동자로 보이는 '흑인' 하녀는 누군가 환심을 사기 위해 보내온 꽃다발을 주인에게 전하고 있다. 한편, 펠릭스 발로통의 <흰 여자와 검은 여자(The White and the Black)>(1913)는 <더러운 잠>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 <올랭피아>를 개작한다. 발로통은 백인 여성의 눈을 다시 감기고, 지금까지 보조 역할에 그치던 흑인 하녀를 전면에 내세운다. 마침내 주인공의 자리를 점한 흑인 여성은 담배를 꼬나물고 그 나름의 프렌치 시크(French Chic)를 구현한다. "파리 사람들이 2000년 동안 해온 건 연애와 혁명뿐이었다"라고 읊조리거나 "정치적 무관심보다 유행에 뒤지는 것은 없지"라고 너스레를 떨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자태를 취한다.

 

+1770

실로 중앙 정계 이외에 달리 정치적 포부나 사회적 책임감을 실현할 대안 공간이 없다면 정계 은퇴는 곧 세상의 뒷방에서 늙어가는 일과 다른 바 없다. 그 피해의식을 극복하면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성리학이다. 성리학의 가치관에 따르면, 중앙 정계에서 높은 관직을 꿰어 차는 것이 결코 능사가 아니다. 진정 훌륭한 인간은 명예와 이익을 얻기 위해 정계에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속된 가치를 넘어서는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은 구태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에 머물러 있어도 전 우주를 꿰뚫는 단일한 이치를 파악하고 실현할 수 있다. 지방에 있다고 해서 못난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1771

분더카머처럼 "외부세계에 편재한 각종 감각적 대상들을 향한 인간의 애호심과 백과사전식 앎의 의지를 입체적으로 표상하고 가시화"하는 대신, 자신이 애호하는 사물과 기억을 빼곡히 기록하는 책을 썼다. 문진형의 <장물지(長物志)> 나 이어의 <한정우기>는 다름 아닌 책으로 된 분더카머다.

 

+1772

실로, 생각은 침잠이 아니라 모험이며, 그것이야말로 저열함에서 도약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타인의 수단으로 동원되기를 거부하고,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일을 넘어, 타성에 젖지 않은 채, 생각의 모험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터전이 바로 생각의 공화국이다.

 

+1773

한국 현대사에서 운동권은 하비 덴트였다. 그들은 부정의한 군부 정권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싸우는 정의의 사도임을 자임했다. 운동권이 마침내 정권을 잡았다는 것은 하비 덴트가 마침내 고담시에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한 것과 같다. 그러나 비판자들의 눈에는 이들 '전직' 운동권조차 정의와 공익의 수호자가 아니며, 자신의 협애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범용한, 다만 운이 좀 좋았던, 그러나 운을 실력으로 착각했던 존재들에 불과하다.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권력을 쥔 전직 운동권이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한 존재로 판명된다면 이는 부정의를 표상했던 군부 정권이 타락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전직 운동권들은 누구보다도 투명하게 정의를 구현하는 존재로 자임하고 그것을 동력으로 권력을 쥐었기 때문에 그들의 실패는 자칫 정의 자체의 불가능성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한국 현대사를 지탱해오던 한 신화가 그 무능함을 드러낸다는 것, 그 신화에 기초해서 구성원들의 정열을 동원해온 서사가 불가능해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전직 운동권들의 위선이 판명된다면 그것은 다른 집단의 도덕적 무능력과는 다르다. 그 사태는 보편적 정의를 표상하는 이 사회의 능력, 공동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서사 가능성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도래할 것은 조커가 열망하던 세계, 즉 자연 상태다.

 

+1774

이곳은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할 자신이 없기에 타인을 더 과도하게 비난하는 세계, 모두가 마음에 죽창 하나쯤은 지닌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연(然)하는 세계, 혐오를 연료 삼아 상대의 의견에 잔혹한 댓글을 다는 세계,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혈안이 된 나머지 점점 저열해지고 있다는 감각마저 마비되는 세계, 당장 피를 흘리지는 않더라도 사실상 내전 중인 세계다. 이러한 자연 상태에서는 타인에 대한 선의를 키울 수 없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상할 수 없고, 자기보다 큰 세계에 대한 시선을 유지할 수 없고, 자신과 세계가 나아지는 도정에 있다는 서사를 향유할 수 없고, 결국에는 위엄 있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1775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을 늘 들여다보지는 않은 채로, 어느 정도의 희망을 유지한 채로, 견딜 수 있는 정도로 현재를 희생해가며, 나름 긴 안목의 삶을 가꾸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1776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건, 최선을 다했고 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일들, 어쩔 수 없었고 동시에 어쩔 수 있었던 일들, 성실했지만 꾸준하지는 못했던 일들,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그러나 때로는 과감했던 일들, 결핍이 있었으나 그 결핍을 메우고자 시도했던 시간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모를 참은 시간들, 저력과 무기력을 동시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이루지 못한 꿈과 대답을 듣지 못한 애착 때문에 미쳐간 시간들이 모두 이 땅의 역사 속에 있다.

 

+1777

마침내 선진국의 꿈을 이루었다는 21세기 한국, 여전히 세상의 성공을 믿지 않는 코미디언들이 있다. 그들은 오늘도 자기만의 실패담을 가지고 옥상에 오른다. 실패했지만 뛰어내리지 않는 사람만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실패를 가지고 남을 웃길 수 있다. 모든 심오한 코미디는 '스탠딩' 코미디다.

 

+1778

그 경제 대국이 도달한 지점은 일종의 번 아웃(burn out) 상태다. 사람들은 지쳤고, 싫은 것은 도대체 더 할 수 없다. 현 지점에 오기까지 정말 말 그대로 미치거나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종신고용을 거부하는 직장의 소모품으로 살다가 부실한 사회 안전망 속으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 개처럼 일하며 인생을 살다가 사라진 전 세대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이제는 없다. 다수를 참고 견디게 했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산업화의 성장 동력은 고갈되어가고, 민주화의 정치적 상징 자원은 퇴색하고 있으며, 모든 권위는 바르게 몰락 중이고, 그 몰락을 틈타 사이비 역사 서술이 창궐한다.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노인들이 불안하게 동거하는 소진된 사회가 목전에 있다.

 

+1779

SF 작가 어슐러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며>에도 지하실 이야기와 복지사회를 떠나는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오멜라스라는 이름의 복지사회는 "울려 퍼지는 즐거운 종소리가 도시를 휘감고 지나며 달콤한 음악이 되어" 들려오는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 복지사회의 지하실에는 한 명의 아이가 박약한 상태로 가두어져 고통을 받고 있다. 이 아이가 고통받는다는 조건 아래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그것이 그들의 풍요와 복지를 지탱하는 사회계약이기에. 그 아이의 처지를 개선해준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누리는 그 행복을 모두 반납해야 한다. 그래서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그 아이의 존재를 견딘다. 그 아이를 방치한 대가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 바로 오멜라스의 사회계약이기에.

 

+1780

중년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생은 늘 위기였는데 그저 중년이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허울 좋은 선진국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사회는 아직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데, 선진국이 갑자기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1781

각자도생에 분투하는 동안 삶은 빨리 지나가고, 영혼은 간헐적으로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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