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Reading

어제의 세계

Die Welt von Gestern

 

[밑줄]

 

+1806

문서나 자세한 자료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마 나의 이 책에는 이로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은 그냥 우연히 보유하고 다른 것은 단지 우연히 상실하는 그런 것이라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식하면서 정리하고 쓸데없는 것을 현명하게 줄이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자기의 인생에서 잊어버리는 것은 모두 원래 내면의 본능에 의해 훨씬 전에 잊히고 말게끔 정해져 있다. 오직 스스로 남으려고 하는 회상만이 다른 여러 가지 회상에 대신하여 남겨질 권리를 갖는다. 그런즉 이야기하라, 선택하라, 그대 회상들이여! 나의 회상 대신 말이다. 그리고 적어도 나의 인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전에 내 인생의 영상을 보여다오!

 

+1807

절대로 남에게 부탁한 일이 없다는 것, '제발' 또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는 내면적인 자부심이 그에게는 어떠한 겉치레보다도 더 의미가 큰 것이었다.

 

+1808

완전히 변해 버린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40대는 30대처럼, 60대는 40대처럼 보이려고 무척 애를 쓴다. 또 오늘의 시대에는 젊음, 정력, 행동력, 자신감을 촉진시키고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 안정의 시대에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사람은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야만 했다. 신문은 수염을 빨리 자라게 하는 수단을 추천했고, 의사 시험을 갓 치른 스물네댓의 젊은 의사들은 짙은 수염을 길렀으며, 눈이 전혀 나쁘지 않은데도 금테 안경을 썼다. 그것은 처음 오는 환자들에게 '경험이 있다'는 이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길고 까만 예복을 입고 여유 있는 걸음걸이를 했으며 될 수 있으면 살이 좀 쪄 보이도록 했다. 그것은 침착함을 몸에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야심이 있는 사람은 착실하지 못하고 의심스러운 젊은 사람들하고는 세상에 대한 체면 때문에 어울리지 않았다. 학생들은 6학년이나 7학년쯤 되면 이제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책가방 대신 서류가방을 사용했다. 오늘날 우리가 부러워하는 신선함, 자신감, 대담성, 호기심, 청춘의 생명욕 같은 모든 속성은, '건실성'만이 효용가치가 있던 그 시대에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1809

김나지움 학생 때에도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과목에서 나쁜 성적을 받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 학교를 그만 두게 하고 직공 견습을 시키겠다고 위협했다(시민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로의 전락은 최대의 위협이었다).

 

+1810

그저 바지만 앉아 있을 뿐인 의자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들어 보지 못했고 우리가 알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아무것도 접할 수 없었다.

 

+1811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에게는 감격이 일종의 전염병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감격은 교실에서 한 학생으로부터 다른 학생에게로 홍역처럼 퍼져 나갔다. 새로운 신봉자들이 어린애들 다운 허영에 찬 야심을 갖고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점점 더 확산되어 나갔다.

 

+1812

대개 10년 남짓이 지나야 인정받기 시작하는 많은 시인들의 이름도 우리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열성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극히 사소한 것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한 번은 존경했던 친구인 폴 발레리아와 도대체 우리 사이의 문학적인 친분 관계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를 내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벌써 30년 전에 그의 시를 읽고 사랑했었다고 말했다. 발레리는 내게 미소를 지으면서 "거짓말하지 말아요! 내 시는 1916년에야 비로소 나왔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1898년 빈에서 발견한, 그의 처녀 시가 실린 문학잡지의 색깔이나 크기에 대하여 내가 아주 세밀한 데까지 얘기를 하자 그는 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잡지를 파리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요"하면서 그는 이상한 듯이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빈에서 그 잡지를 손에 넣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나는 "김나지움 학생인 당신이 문단에서도 거의 알지 못하는 말라르메의 시를 손에 넣은 것과 같은 방법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기꺼이 동의했다. "젊은 사람들이란 그들의 시인을 발견하는 법이지요. 그것을 발견하려고 소망하니까요." 

 

+1813

사실 우리는 바람이 국경을 타고 넘어오기 전에 벌써 그 냄새를 맡았다. 우리는 쉬지 않고 후각을 긴장시키며 살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며 그것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우리에게만 속하는 것이며 우리의 아버지 세계나 주위의 세계에는 속하지 않는 것이었다. 청춘은 어떤 종류의 짐승처럼 기후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비상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교사들이나 대학교보다 먼저, 예술의 영역에서 낡은 세계는 끝났으며, 혁명 또는 가치 전환이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1814

그러므로 나 역시 호프만슈탈을 직접 보았던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그 때 열여섯 살이었다... 그는 헤엄치는 사람이 단숨에 친숙한 물속으로 뛰어들듯 말을 시작했다. 그가 이야기를 진행함에 따라 그의 몸짓은 더한층 자유스러워지고 태도는 한층 자신만만해져 갔다. 정신적인 공기 속에 들어가자마자 - 이따금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도 나는 이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처음의 어색함은 없어지고 영감을 받은 인간에게서 언제나 볼 수 있는 멋진 경쾌함과 발랄함이 그를 휘감았다. 

 

+1815

나는 호프만슈탈처럼 고도의 정신적 수준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영감을 받은 그 순간에는 그가 읽은 모든 책, 그가 본 모든 그림, 모든 풍경 등 그러한 모든 것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그의 마신처럼 각성된 기억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나의 비유는 다른 비유와 마치 손을 잡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결합하였다.

 

+1816

어떤 의미에서 호프만슈탈은 두 번 다시 17세에서 24세 사이에 있었던 기적을 능가할 수 없었다... 또 자신의 여러 계획을 더 한츠 ㅇ의식하게 되고 야심을 품기에 이르자, 몽유병자처럼 정확한 그 무엇, 초기의 소년다운 시가 보여 준 순수하고 영적인 것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 청춘의 도취와 희열 역시 상실되어갔다. 미성년자 특유의 마법적인 지혜로써 우리는 이러한 기적이 단 한번뿐이며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1817

사춘기 나이에 시적인 충동은 모든 젊은이에게 일어나지만 대개 일시적 파도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청년기를 지나서도 지속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나는 창조적인 정열을 계속 간직하면서 그 정열이 전 생애의 의미 또는 핵심이 되어 버린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옛 우정을 되새겨 볼 때 나는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우정은 얼마나 많이 나를 도와주었던가! 불같은 토론, 거친 경쟁, 서로의 찬미와 비판이 얼마나 일찍부터 내손과 신경을 단련시켜 주었던가! 그리하여 정신적 우주를 향한 전망이 넓고 높아졌으며, 우리 모두는 학교의 황량하고 음산한 분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날개를 얻었던 것이다! "그대 정다운 예술이여, 얼마나 많은 우울한 시간에..." 하는 슈베르트의 불멸의 리이트가 울려 퍼지면, 언제나 확신한 모습을 가진 영상으로, 학교에서 볼품없는 의자 위에 어깨를 쭈그리고 앉아 있는 우리의 옛 모습,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빛나고 흥분된 눈초리로 시를 비평하고 암송하며, 모든 시간과 공간의 속박을 정열적으로 잊어버리고 참으로 '더 좋은 세계로 옮아간' 우리의 모습을 회상하게 된다.

 

+1818

오스트리아 사회당의 상승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준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그들의 힘과 단합을 보여주기 위해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기념일로 선언하고, 프라터대공원으로 행진할 것을 결정했다. 그것도 중심가를 걸어간다는 것이다. 그 거리는 귀족이나 잘 사는 시민 계급의 호화로운 마차만이 오갈 수 있는 아름답고 넓은 밤나무 가로수길이었다. 

 

+1819

결론적으로 모든 계몽과 이성과의 자연스런 모든 교제가 금지되어 있었던 저 세대는, 더 큰 연애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청년들보다 천배나 더 에로틱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절된 자만이 욕정을 돋우고, 금지된 자만이 욕망을 불태우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적을수록 생각은 한층 더 많은 꿈을 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에 가까이하는 공기, 빛, 태양이 적으며 적을수록 감각은 점점 더 괴로워하게 되었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청춘에 대한 사회의 압박은 고도의 도덕성을 가져오는 대신, 모든 권위에 대한 불신과 불만만을 우리 마음에 생기게 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장의 첫날부터, 은폐하고 침묵하는 그들의 부정직한 도덕이, 당연히 우리의 나이에 속하는 그 무엇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려 한다는 것과 정직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오래전부터 거짓이 된 인습의 희생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1820

좋은 책은 최상의 대학교를 대신한다는 에머슨의 원리는, 나에게는 확고하고 타당한 것이었다.

 

+1821

내가 선택하는 데 실제 기준이 된 것은 어느 학과가 나를 가장 내면적으로 몰두하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느 학과가 나를 번거롭게 하는 일이 가장 적고 나의 정열을 위해 시간과 자유를 최대한 허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필요한 모든 것은 8학기의 마지막에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몇 가지의 시험을 치르는 일어있다. 그래서 나는 미리 나 자신을 위한 시간표를 정리해 놓았다. 그것은 3년간은 대학교 공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1년 동안 최선의 노력을 다해 학문적인 재료를 마스터하고 학위 논문을 빨리 끝마치는 일이다. 그러자 대학교는 내가 대학교에서 원하던 단 한 가지, 즉 나의 인생을 위한, 그리고 예술에 진력하기 위한 2~3년간의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 그렇게 해서 삶의 만상을 보여 주는 인생대학교가 펼쳐졌던 것이다. 나의 인생을 돌이켜볼 때, 이 대학교 없는 대학생으로서의 그 첫 시절만큼 행복한 때를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젊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직 무엇인가를 완성하고 성취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지 않았다. 나는 모든 일에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의 24시간은 나의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변명의 의무가 없이 원하는 것을 읽고 행할 수가 있었다. 

 

+1822

한 작가의 생애에서 최대의 성공 뒤에나 오는,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저 잊을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이 내게 찾아왔다. 출판사의 마크가 든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던 것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쥔 나는 처음엔 펼쳐볼 용기조차 없었다. 숨을 죽이며 출판사가 그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그리고 다음에 나올 책까지도 계약한다는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초교지 묶음이 소포로 왔다. 한없이 소포를 풀고는 활자와 식자면 그리고 책으로 되기 전 태아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몇 주일 뒤에는 바로 그 최초의 책 초판본 몇 부가 왔다. 그것을 싫증 내지 않고 바라보고 만지고 비교하는 일을 처음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이미 그 책이 진열장에 나와 있는지 없는지, 혹은 그것이 책방 한가운데서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가 아니면 눈에 띄지 않게 구석 쪽에 숨어 있는가를 살피며 어린애처럼 책방을 돌아다녀 보았다. 그리고는 미지의 사람들, 뜻하지 않었던 사람들로부터 최초의 편지, 최초의 서평, 최초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 같은 긴장, 흥분, 감격은 내가 최초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 모든 청년들에게서 부럽다 생각하는 점이다.

 

+1823

그러나 드레퓌스가 파면되는 순간, 그것은 자기 민족의 영원한 추방이라는 생각이 단검처럼 그의 가슴에 꽂혀 들었다. '만약 격리가 불가피하다면 그때에는 완전한 격리다'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만약 굴욕이 영원토록 우리 운명이라면, 그 운명에 자부심을 갖고 직면하자.' 만약 우리가 고향이 없다는 것을 괴로워해야 한다면, 새로운 고향을 우리 자신을 위해 세우자!' 이렇게 하여 그의 소책자인 <유태 국가>가 1896년 발간되었다. 거기에서 헤르츨은 동화하려는 모든 시도와 완전한 관용에 대한 모든 희망은 유태 민족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그 옛날 고향인 팔레스타인에 하나의 새로운 자기들만의 고향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24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외국에서 배웠어요. 외국에 있어야만 사람은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지요. 나는 확신하지만, 여기서는 저 최초의 반응에 맞붙을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오. 나의 이념이 아직 꽃봉오리나 성장 상태에 있을 때에 사람들은 그것을 없애 버렸을 것이오. 그러나 고맙게도 내가 그것을 외국에서 가지고 왔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어, 사람들은 나를 번쩍 들어 올리는 일만 있었지요."

 

+1825

나의 시간을 외국어 번역에 이용했다. 이 일은 젊은 시인이 모국어를 더 깊이 있게 더 창조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길이라고 나는 오늘날에도 생각하고 있다.

 

+1826

언제나 그는 이렇게 도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서, 우연한 체험에도 감격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감격은 그에게는 신성한 습관으로 되어 있었다. 이 감격은 불꽃처럼 쉬지 않고 입술에서 솟아나왔고, 날카로운 몸짓으로 말한 것을 훌륭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그는 최초의 말 한마디로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갔다. 모든 새로운 것에 접근할 수 있도록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고 하나하나의 것에 완전히 마음을 터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향해 그의 전 존재를 던지는 것이었다. 바로 이 최초의 순간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본질을 남에게 폭풍우처럼 압도적으로 맞부딪치는 것을, 나는 행복스럽게도 수백 번이나 체험했다.

 

+1827

좌우간 젊은 내 앞에는, 내가 원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이고 내가 꿈꾸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육체를 갖춘 시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만남의 최초의 시간에 벌써 나는 결심했다. 즉 이 인물과 그의 작품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이다. 그것은 참으로 모험적인 결심이었다. 이 유럽의 찬미자는 당시 유럽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내가 그의 기념비적인 시작품과 세 개의 시극을 번역한다면 내 창작 활동의 2~3년을 잃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힘, 시간, 정열을 어떤 외국 작품을 번역하는 데 바치려고 결심함으로써, 나는 자신에게 가장 훌륭한 것, 즉 도덕적인 과제를 부여한 것이었다. 나의 확실치 않은 탐구와 시도는 이제 하나의 의미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늘날 아직 자신의 길에 확신이 없는 젊은 작가에게 충고를 준다면, 나는 상당히 위대한 작품을 각색하거나 번역하는 데 봉사하라고 권장할 것이다. 초심자의 모든 자기 헌신적인 봉사 속에는 자기가 창조하는 것 이상의 확실성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몰두하여 행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 헛된 일이 없는 것이다.

 

+1828

내가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며, 또한 마지막이엇다. 이제 나는 외적으로 자유롭게 되었으며, 그 이후 오늘날까지의 모든 세월은 내면적으로도 마찬가지로 계속 자유로워야 한다는 하나의 싸움=우리 시대에는 점점 더 힘들어져 가는 싸움-에만 바쳐졌다.

 

+1829

이들 모든 시인 가운데 릴케만큼 소리 없이, 비밀스럽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모든 소음, 그리고 자신의 명성 -언젠가 그가 아름답게 표현했던 것처럼 '하나의 이름 주위에 모여 오는 모든 오해의 총계"-까지도 피했기 때문에, 헛되게 몰려오는 호기심의 큰 파도는 그의 이름만을 침해했지 그의 인격을 침해하지는 못했다.

 

+1830

"이런 사람들은 나를 지쳐 버리게 합니다. 그들은 자기감정을 피처럼 토해 내니까 말입니다."

 

+1831

그리고 가장 멋진 것은 파리에서 릴케와 함께 산책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깨어난 눈으로 그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1832

그러나 로댕의 집에서 나는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 번도 그에게 말을 붙일 수가 없었고, 조각들 사이에서 마치 그것들 중의 하나인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의 어쩔 줄 몰라하는 태도가 그를 즐겁게 한 것 같았다. 작별을 고할 때 이 노인은 나에게 뮤동에 있는 자기의 진짜 아틀리에를 보고 싶지 않은가 하고 물었고 식사도 하자고 초대해 주었다. 그때 첫 번째 가르침이 내게 주어졌다. 즉 위대한 사람들은 언제나 친절하다는 것 말이다. 두 번재 가르침은 위대한 사람들은 그 실생활에서는 언제나 가장 검소하다는 것이다. 명성이 세계를 채우고, 우리 세대에서는 그의 작품의 선 하나하나가 가장 오래된 친구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 인물의 집에서는, 중류 농부의 집처럼 간소한 식사가 베풀어졌다.

 

+1833

그는 무겁게 주름 잡힌 농부와 같은 손으로 천을 제치고 뒤로 물러섰다. "멋진데요"라는 한 마디를 자기도 모르게 막힌 가슴에서 토해낸 나는 곧 이 무례함을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자만하는 데가 없는 침착한 객관성을 갖고 자기 작품을 바라보면서 나의 말에 동의하며 중얼대는 것이었다. "그럴까요?" 그리고는 그는 주저했다. "단지 저 어깨 있는 데가...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그는 재킷을 내던지고 흰 작업복을 걸치고, 주걱을 손에 쥐고는 어깨 언저리의 부드럽게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여자의 살결을 익숙한 터치로 매끄럽게 했다. 그는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나서기도 하고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거울로 조각을 바라보기도 하고, 투덜거리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서 하고는 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꾸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했다. 식사 중에는 다정하게 풀려 있던 그의 눈은 이제 이상한 빛으로 번쩍이더니, 그는 더 크고 젊어진 듯이 보였다. 그는 일하고 또 일했다. 그의 힘세고 무거운 신체의 모든 정열과 정력을 다해 일했다. 그가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갈 때마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는 자기 등 뒤에 소리도 내지 않고 한 젊은 사나이가 목구멍으로 감탄의 소리를 억누르면서 이런 둘도 없는 거장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행복에 잠겨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15분이나 반시간이 지났을까,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위대한 순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시간의 저쪽에 있다. 로댕은 그의 작업에 몰두하고 빠져 있었기 때문에 천둥이 쳐도 그를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동작은 점점 더 엄하고 거의 성을 내는 것처럼 되었다. 일종의 난폭함과 도취가 그를 엄습해 와 그는 점점 저 빨리 일을 해 갔다. 얼마 안 있어 두 손이 멈춰지게 되었다. 그 두 손은 자기는 이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는 뒤로 물러섰지만 이제 고칠 데가 없었다. 그리고는 그는 낮은 목소리로 수염 속에서 뭐라고 중얼대고는, 마치 숄을 사랑하는 여자의 어깨에 둘러 주듯 애정을 담아 천을 그 조각 위에 씌웠다. 그는 깊이 긴장을 풀 듯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모습은 다시 더 무거워져 가는 것 같았다. 불은 꺼져 갔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위대한 가르침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작업복을 벗고, 다시 재킷을 입고는 아틀리에를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 극도로 집중한 시간에 그는 나를 완전히 잊었던 것이었다. 그는 작품을 보여 주기 위해 자기가 아틀리에로 데리고 간 한 젊은이가 숨을 죽이고 조각들처럼 꼼짝도 않고 그의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이미 잊고 있었다. 그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닫으려고 했을 때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거의 화가 난 듯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틀리에에 침입한 이 젊은 외국인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나에 대해 생각해 내고는 거의 부끄러워하면서 다가왔다. "미안해요"하고 그는 말하기 시작햇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말을 계속하게 하지 않았다. 다만 고마워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 키스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나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아니 모든 지상의 성취의 영원한 비밀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즉 집중, 모든 힘과 모든 감각의 응집, 그 무아지경, 모든 예술가가 행하는 자기의 바깥에 있는 것,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위한 그 무엇을 배웠던 것이다.

 

+1834

나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늘 운명에 의해 쓰러진 자이면, 전기 작품에서도 현절적인 장이 아닌 도덕적 의미에서 성공한 인간의 참된 모습에 마음이 쏠렸다. 즉 루터가 아니라 에라스므스,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메리 스튜어트, 칼빈이 아니라 카스텔리오에 쏠렸다.

 

+1835

운명이란 것이 우연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청춘 시절뿐이다. 나중이 되면 우리는 삶의 참된 길은 내면에 의해 규정되어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길이 아무리 엉망이고, 아무 의미도 없이 우리의 열망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결국 그것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목표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1836

글을 쓰고 책을 내게 되면서 나의 이름은 독일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는 국외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찬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독특한 개성을 더 잘 나타내는 것이지만, 이미 반대자도 갖고 있었다.

 

+1837

정신적인 심도와 명쾌함에서 오직 호프만슈탈, 발레리, 카이저링 백작과의 대화와 비교할 수 있는 활기에 찬 라테나우와의 대화에서, 나는 시야가 넓어졌고 또 나의 지평선이 순수하게 문학적인 것에서 동시대의 역사 속으로 확대되었으면, 이와 함게 그에 의해 유럽을 넘어서는 최초의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영국이라는 섬만을 알고 있는 한 당신은 영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라고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적어도 한 번 넘어 보지 않으면 우리 대륙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자유를 이용하십시오! 문학은 멋진 직업입니다. 그 직업에서 서두른다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년 더 걸리든 덜 걸리든 정말로 좋은 한 권의 책에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1838

사람들이 돈을 지금보다 더 절약해서 쓰고 쿠크여행사의 관광 여행 조직도 아직 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에는, 유럽을 넘어서 여행하는 자는 거의 대부분 신분과 지위에서 특수한 사람이었다. 상인으로 말하면 시야가 좁은 작은 잡화상이 아니라 큰 도매상이며, 의사로 말하면 참된 연구자, 기업가라면 대담하고 배짱 있고 무모한 정복자, 작가라면 고도의 정신적 호기심의 소유자였다. 여행의 긴 나날과 긴 밤 동안-당시에는 아직 라디오가 끊임없이 떠들면서 따라다지 않았다. - 이와 같은 색다른 종류의 인간들과의 교제에 의해, 나는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갖가지 힘과 긴장에 대해 100권의 책에서 배우는 것 이상을 배웠다. 고향으로부터의 거리는 내면의 척도를 바꿔 놓았다.

 

+1839

오늘날 조용히 과거를 반추하며, 어찌하여 유럽이 1914년에 전쟁에까지 이르렀는지를 자문해 본다면, 이성에 맞는 단 하나의 이유도, 단 하나의 동기도 찾아낼 수가 없다. 그것은 어떤 이념을 위해서도, 국경의 작은 영토 때문에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힘의 과잉 상태에 의한 것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40년간의 평화로운 시기에 축적되었다가 폭력적으로 폭발한 내면적인 다이너미즘의 비극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한 국가가 갑자기 강하다는 감정을 갖게 되었는데,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각국은 더 많은 것을 원했고 다른 나라로부터 무엇인가를 원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바로 그 감정이, 즉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낙관주의가 우리를 배반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각국은 최후 순간에는 다른 나라가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40

내가 발벗고 싸워야 할 적을 나는 인식했다. 즉, 즐겨 남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거짓 영웅 정신, 주저 없이 승리를 약속하면서 전쟁을 오래 끌고 있는 정계 및 군부 양쪽 모두의 양심 없는 예언자들의 안일한 낙관주의

 

+1841

이외에도 도처에 반반으로 양쪽 나라에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이나,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혼혈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독일 장교와 결혼한 영국 여자들, 오스트리아 외교관의 프랑스인 어머니. 한 아들은 이쪽 나라에서 봉사하고 있고, 다른 아들은 저쪽 나라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부모가 이쪽과 저쪽에서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가정. 얼마 안 되는 재산이 이쪽에서 몰수된 사람, 저쪽에서 지위를 잃은 사람. 모든 찢겨진 사람들은 옛 고향에서나 새로운 고향에서나 마찬가지로 그들을 추적하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위스로 도망해 왔다. 엉망이 되고 때려 부서진 그들은 어느 한쪽으로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해, 어떤 언어로도 말하는 것을 피했고, 그림자처럼 여기저기를 살금살금 걸어 다녔다. 한 인간이 유럽에서 유럽적인 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 인간은 유럽을 분쇄하는 주먹에 의해 더욱더 지독하게 벌을 받는 것이었다.

 

+1842

사실 그 모든 커피하우스의 음모가들 가운데 한 사람도 음모를 실행에 옮긴 사람은 없었고, 즉흥적인 세계 정책가들 강운데 한 사람도 정말로 필요할 때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1843

가장 기묘한 일은, 오늘날 내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전후의 세월 동안에 어떻게 가계를 꾸려 나갔는지, 도대체 어디에서 차례차례로 오스트리아에서는 1000크로네, 1만 크로네를, 또 독일에서는 100만 마르크를 손에 넣었는지 전혀 기억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사람들은 그러한 금액을 가지고 있었다...이제는 아무도 물건을 살 수 없기 때문에 가게는 황폐하게 되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극장이나 오락장은 완전히 텅 비게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상상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정은 정반대였다. 계속 살아가려는 의지는 돈의 불안정성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재정적 혼란이 한창일 때 일상생활은 거의 방해받지 않고 계속되어 갔다. 개개인으로 보면 변화는 아주 심했다. 가령 은행의 예금과 정부 지폐는 녹아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은 가난해졌고, 투기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수레바퀴는 개인의 운명과는 관계없이 같은 리듬으로 계속 돌아가 아무것도 정지하지는 않았다. 빵가게는 빵을 굽고, 구둣방은 장화를 만들고, 작가는 책을 쓰고, 농부는 밭을 갈고, 열차는 규칙적으로 다니고, 매일 아침 신문은 정해진 시간에 배달되고, 무엇보다 오락장, 술집, 극장은 사람으로 넘쳐 있었다. 왜냐하면 전에는 가장 안정된 것이었던 돈이 매일 그 가치를 잃어 가고 있다는 예기치 않았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인생의 참된 가치를 - 일, 사랑, 우정, 예술, 자연을 - 한층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44

전에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더 한층 중요하게 되었다. 우리는 오스트리아에서, 저 혼란한 시절보다 더 예술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의 붕괴를 통해 우리 가슴속의 영원한 것만이 참으로 영속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1845

그것은 기존의 것, 이미 성취한 것을 단지 하나의 격렬한 도약으로 뛰어넘으려고 했다. 젊으면 젊을수록, 배운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어떠한 전통에도 속박되어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그만큼 환영을 받았다. - 드디어 부모의 세계애 대한 청년의 큰 복수가 승리에 차 날뛰었던 것이다.

 

+1846

모든 영역에서 노인들은 당황해 하면서 최신 유행을 쫓았다. 최고의 야심이라고 한다면, 어제의 시대에 뒤떨어진 경향을 대체할 뭔가 새롭고, 이때까지 들어보지 못한, 더욱 급진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젊게'있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1847

독일 공화국에게는 민중에게 그리고 적에게까지도 자유를 주려는 그 이상주의적인 시도만큼 재난을 가져온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질서의 민족인 독일 민족은 그 자유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지 못하고 벌서 불안한 태도로 자유를 빼앗아 가는 사람들을 스스로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인플레가 끝난 날(1923년)은 역사상의 한 전환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종이 한 번 울림과 동시에 1조까지 올라갔던 마르크가 새 통화의 단 1마르크로 교환되었을 때, 하나의 규범은 새로 제정되었다.

 

+1848

나의 개인 생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이 세월 사이에 한 손님이 나의 집에 찾아와 기분 좋게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 즉 성공이었다.

 

+1849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전기물의 경우에는, 나는 실제로 그녀의 개인적인 소비 행태를 확인하기 위해 하나하나 어떤 계산도 재검토했고, 그 시대의 모든 신문이나 소책자를 연구했고, 모든 소송 서류를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인쇄된 책에는 이들 모든 것에 관해서는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책의 대략적인 초고가 청서(淸書) 되자마자 나는 본격적인 작업인 압축과 구성 작업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 하나하나에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끝나지 않는 작업이다. 그것은 쉬지 않고 배의 안정을 위해 바닥의 짐을 갑판 위에서 내던지는 것과 같은 작업이며, 내면의 건축을 부단히 농축시키고 명석 화하는 일이다. 많은 다른 작가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그 무엇을 말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뜻대로 쓰인 문자에 홀려서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안목 이상으로 더 넓고 깊은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데 반해, 나의 야심은 언제나 겉으로 나타나는 것보다 더 많이 나의 지식을 점점 더 깊이 있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농축의 과정, 따라서 극적인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교정지로 한 번, 두 번, 세 번식 되풀이된다. 그것은 결국 그것이 없어도 정확성을 줄이지 않고도 동시에 템포를 높일 수 있는 하나의 문장, 또는 하나의 말을 찾아내려는 일종의 즐거운 사냥과 같은 것이 된다. 나의 작업 중에서는 이렇게 내버리는 일이 사실 나에게는 가장 즐거운 일이다. 언젠가 내가 특히 만족해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내가 "오늘은 뭔가 특별히 잘된 것 같군요"하고 말했을 때, 나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대답한 일이 있다. "맞았어. 또 한 문장 전체를 없애 버렸기 때문에 한층 더 급템포로 진행시킬 수 있었어." 그러므로 나의 저서에서 이따금 감동적인 템포가 칭찬을 받고 있다면, 이 특질은 결코 자연의 열기나 내면의 흥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불필요한 중간 쉬기나 잡음을 쉬지 않고 제거하는 저 체계적인 방법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뭔가 어떤 종류의 기술을 체득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포기할 줄 아는 기술이다. 왜냐하면 1000쪽 중에서 800쪽이 휴지통에 들어가 버리고 200쪽만만이 체에 거른 정수로서 남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한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1850

어떠한 형태로든 널리 알려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한 인간의 자연적인 균형을 잃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1851

성공을 하면 이름은 말하자면 부풀어 오른다. 이름은 그것을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서 떠나 그 자신이 하나의 세력, 힘, 물(物) 자체, 거래 품목, 자본이 된다. 그리고 다시 심리학적으로 심한 반동을 갖고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인간에게 영향을 주고, 지배하고 변모시키기 시작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힘으로 자기의 외적인 성취의 크기를 얻은 것이라고 뽐낸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종류의 외적 성공이라는 것을 그런 곤란한 상태에서 가능한 한 변함없이 자기를 유지하는 하나의 책임으로 간주한다.

 

+1852

비로소 나는 소위 말하는 '상류'세계를 들여다보았고, 또 누구와도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쾌적함과 편리함을 가지게 되었다. 

 

+1853

"사람을 젊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저항 그 자체입니다. 만일 내가 상원의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내 생활은 너무나 안락해서 오래 전에 정신적으로 나태하고 줏대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정신적 인간에게 저항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만큼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고독해지고 또 주위에 청년들이 없어지나 다시 스스로 젊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메레즈콥스키

 

+1854

풀 수 없는 수많은 세계의 수수께끼 중에서 가장 깊고 가장 신비로운 것은 역시 창조의 비밀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연은 그 신비를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지 않으며, 어떻게 대지가 생겼는가, 어떻게 해서 작은 꽃이 피는가, 또 하나의 시, 한 인간이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마지막 비결을 꿰뚫어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1855

예술가라는 것은 인생을 거칠게 던져지면 평안을 동경하지만, 이제 평안이 주어지면 다시 긴장을 동경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50회 생일에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부정스러운 소망 하나만을 가졌다. 즉 이 안정과 쾌적함을 빼앗아가서, 내가 단지 계속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이 시작하도록 강요하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늙어가는 것, 피로 그리고 나태해지려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영혼을 위해 조금 다른 더 괴로운 생활을 갈망케 한 신비한 예감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1856

그는 이 음악을 처음 듣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마치 생판 다른 작곡가에 의해 쓰인 것처럼 자기 작품을 구체적으로 공평하게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이 놀랄 만한 자각은 절대로 그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었다. 자기는 누구인가, 자기는 어느 만큼 해낼 수 있는가를 언제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자기와 비교해 얼마나 작게 또는 얼마나 크게 평가되고 있는가 하는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또 자기가 남들에게 어느 만큼 평가받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기쁘게 한 것은 작업 그 자체였다. '일을 한다'는 것은 슈트라우스에게 아주 주목할 만한 과정이었다.

 

+1857

현대의 혁명은 근대적 대도시의 거대한 공간 안에서는 얼마 안 되는 작은 장소에서만 일어나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하나도 보지 못한 채로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번만큼 현대 혁명의 기교와 특질을 잘 나타내는 것은 따로 없다. 그래서 이상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1934년 2월의 그 역사적인 순간에 빈에 있으면서도 그때 일어나고 있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또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날고 있다는 것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대표를 쏘고 건물들이 점거되고 수백 명의 시체가 운반되어 나갔겠지만, 나는 단 한 구의 시체도 보지 못했다. 뉴욕, 파리, 런던의 신문 독자들은 겉으로만 목격자인 우리들보다도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는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사건의 현장으로부터 열 블록 내에 사는 사람들보다 사건에 대해 훨씬 잘 알 수 있다는 놀랄만한 현상을 훗날 거듭 확인하게 되었다.

 

+1858

이제 나이가 50이 넘어서 나는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게 되었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기도 하고, 아침이면 도서관에 걸어가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옛날처럼 신념을 갖고 있지 않았고 열광하지도 않았으며,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고, 지쳐 버린 영혼 때문에 강한 마음이 꺾이는 기분이 희미하게 드리워졌다.

 

+1859

실제로 인간의 개인적인 행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개인 시민권의 감소만큼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빠진 엄청난 퇴보를 확실하게 나타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1914년 이전에는 대지는 모든 인간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고,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었다. 허가도 없었고 비자 같은 것도 없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내가 1914년 이전에 인도와 미국을 여행했을 때는 여권이 없었고, 또 그런 것은 도대체 본 적도 없다고 들려줄 때면, 그들은 신기하다는 듯 놀라는 것을 나는 언제나 재미있어했다.

 

'+ Read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솔뮤직 러버스 온리  (1) 2022.12.13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1) 2022.12.03
로커웨이, 이토록 멋진 일상  (2) 2022.10.07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2) 2022.09.28
공부란 무엇인가  (0) 2022.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