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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인생의 역사

[밑줄]

+1910

체호프는 입센의 작품을 보며 '인생은 저렇지 않아'라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입센의 세계는 아무리 복잡한 비밀도 결국은 풀리면서 끝나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 '문학적인'세계라는 것. 체호프는 다르다, 라고 비평한 제임스 우드는 말한다. 체호프는 수수께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수수께끼로 끝낸다고. 인생의 질문들 앞에서 '난 모른다'라고 중얼거릴 따름이라고.

 

+1911

내가 조금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

 

+1912

'인간이라는 직업'(알렉상드르 졸리앵)

 

+1913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상대가 필요한 사람은 대등하게 약하지 않다. 전자는 내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만, 후자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것이다.

 

+1914

무신론자에게 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란 곧 사유와 의지의 패배를 뜻할 뿐이지만,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신을 발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1915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는 좋다. 그게 진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언제나 진실한 것은 오직 고통뿐이라는 것.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없을 것이다.

 

+1916

"지옥"이 창조되기 위해서도 단테가 상상한 총 아홉개의 구역 따위는 필요 없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뜨기만 하면 지금 여기가 지옥이므로. 그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1917

소네트 73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 해 중 그런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

전에 예쁜 새들이 노래했지만 이젠 황폐한 성가대석.

추위를 견디며 흔들리는 그 가지들 위에

누런 잎들 하나 없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계절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해가 진 후

서녘에서 스러지는 그런 날의 황혼을.

만물을 휴식 속에 밀봉해버리는 죽음의 분신인

시커먼 밤이 조금씩 앗아가는 황혼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불타오르게 해준 것에 

다 태워져, 꺼질 수밖에 없는

임종의 자리처럼, 제 젊음의 재 위에

누워 있는 그런 불의 희미한 가물거림을.

그대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 사랑 더 강해져,

그대가 머지않아 잃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게 되리라.

 

+1918

2015년 초에 뒤늦게 번역되어 그간 좋은 소설로 충분히 단련된 독자들마저 탄식하게 만든 <스토너>는 초반 30쪽만 읽어도 눈물이 고이는 이상한 소설인데, 농민의 아들인 스토너가 농과대학에 들어갔다가 영문학개론 시간에 이 73번 소네트를 읽고 문학에 눈을 떠서 처음으로 부모의 뜻을 거스르기로 결심하는 장면을 읽을 때 나는 완전히 수긍할 수 있었다. 73번은 그렇게 삶을 다시 처음인 듯 살기 시작하게 만드는 시이기 때문이다.

 

+1919

나는 내 안의 청년에게 이 시를 읽어주면서 삶을 더 사랑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고집이 세고 기억력도 나쁘다. 셰익스피어가 옳다. 그가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

 

+1920

위대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들의 답에 놀라본 적이 별로 없다. 그 답은 너무 소박하거나 반대로 너무 거창했다. 그러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1921

시인 랭보는 10대 후반에 짓이기듯이 선언했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착란1>) 이 선언에 담긴 취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부르주아적 논리와 관습에 오염되어 단지 이익의 거래가 되었을 뿐이며, 사랑의 아름다운 귀결로 간주되는 결혼이라는 것은 차가운 멸시를 먹고사는 괴물일 뿐이다.' 랭보가 말한 것은 발명이 아니라 재발명이다. 어떤 가치 혹은 제도의 재발명을 요청하는 사람은 혁명적이다. 기존의 것은 가짜라고, 진짜는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1922

인간이 더는 못 살겠는 때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살 '방법'이 없거나(불가능), 살 '이유'가 없거나(무의미).

 

+1923

사랑과 동정이 같다고 주장한 사람 중에 쇼펜하우어가 잇고, 그 둘을 혼동하지 말라고 한 사람 중에 막스 셀러가 있다...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진실이다. 그러나 나의 진실은 아니다. 사랑은 세상이 고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사랑은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다. 나의 진실은 다음 문장에 있다. "Amo: Volo utsis."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에 적힌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훗날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9장2절)에서 다시 적은 그 말.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은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너는 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아무볼로 우트 시스. 세상이 고통이어도 함께 살아내자고,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는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는 네 개의 단어. 

 

+1924

가브리엘 마르셀은 말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존재의 신비2>) 이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역시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제 나는 어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니까.

 

+1925

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시를 만난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1926

많은 문학이론가에 의하면 소설은 본질적으로 패배의 기록이다. 세계의 완강한 질서에 감히 도전하는 개인이 있는데,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끝내 포기하지 않아서. 그 비타협의 결과로 그는 패배하고 말지만, 그 순도 높은 패배가 오히려 주인공의 궁극적인 승리가 되는 아이러니의 기록.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것.

 

+1927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으니 그의 생은 내내 고달팠겠으나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리라.

 

+1928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진정한 나를 찾느라 번민하는 이들, 혹은 너무 많은 나 앞에서 자신을 위선자로 자학하는 이들에게, 이 일본 소설가는 그냥 우리에게 여러 개의 나가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한다.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 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 dividual'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로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 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1929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의 분인의 힘으로 여러 다른 분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1930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들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1931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 황동규

...

실란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

다시 타기 시작한다

...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

 

+1932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한 인간의 육체를 지탱하는 것이 밥이라면 정신을 북돋우는 것은 인정이다. 서구의 석학들이 한 말인데 기꺼이 동의하는 편이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우리가 평생 놓아주지 않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이고, 그 물음은 깊은 곳에서 '나는 네가 욕망할(인정할) 만한 사람인가?'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삶은 지독히 '외로운 사업'이 되고 만다.

 

+1933

'외로움 loneliness'과 '고독 solitude'을 분리하는 것이 나아 보인다. 한나 아렌트처럼 말이다. "고독 속에서 나는, 나 자신과 함께 있는 '홀로'이다. 그러므로 하나-속의-둘 two-in-one이다.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모든 타인들에 의해 버려진, 그야말로 하나one다."(<전체주의의 기원>) 요컨대 외로움과 달리 고독은 나를 둘로 나누어 대화하게 만든다는 것.

 

+1934

개별화란, 오히려 개개의 인간이 그 속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것에 가까이 이르게 되는, 즉 세계의 가까이에 이르게 되는 그런 고독화이다."(<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1935

백상현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을 덧붙였다. "누구도 금지된 사랑에 매달린 두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도청을 사수했더 ㄴ그들의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갈릴레이의 미친 지동설을 믿지 않는다. 귀를 자른 화가의 작품을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독 속의 그들은 당신들의 평범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미래는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에." (<고독의 매뉴얼>)

 

+1936

내가 보기에 황동규는 외로움이 더는 외로움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가장 섬세하게 포착하는 시인 중 하나다... "무언가를 찾으러 장롱 밑에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 (<삶의 향기 몇 점>)

 

+1937

개미는 위태로운 등반 끝에 드디어 꽃에 도착한다. 그다음은? 더는 할 일이 없어 그만 쪼그리고 앉아버렸다.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아들이 그러고 있었듯이. 그때 무슨 깨달음처럼 베란다 전체가 환해진다.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 추억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착이 빚은 일종의 정지 상태라는 것. 그 추억에서 이제는 내려와야 할 때가 되었다. 개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는 아버지를 비로소 떠나보냈고, 외로움은 환해져 홀로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짐작해 보는 것이지만 나는 아직도 홀로움을 다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리라.

 

+1938

사포는 오늘날 레즈비어니즘의 상징 중 하나다. 그가 당시 여성들의 '동아리 Thiasoi'에서 멘토이자 연인으로서 소녀들을 사랑했다는 것과 그래서 그곳 '레스보스'섬이 오늘날 '레즈비언'의 어원이 되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1939

전쟁 영웅을 숭상하고 무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사포는 그 모든 것보다 한 소녀를 택한다. 아름다운 것을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이 시의 전언은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가치의 입법자여야 한다는 시인의 선언이기도 하다. 이런 개인들의 목소리를 옹호하는 일은 공동체의 운명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개인이 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다만 권세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애국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자신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에게 하라는 말이어서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 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것도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될 용의가 있다.

 

+1940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스승을 찾는 거지요." 자신을 찾아온 후배 시인 이우성에게 이성복은 이렇게 말한다... 글을 웹만큼 써서 나름의 요령이 생기면 스승의 자리가 슬그머니 없어진다. '스승께서 이 글을 보고 뭐라 하실까?' 이렇게 자문하게 만드는 '글쓰기의 초자아'가 잊힌다는 것이다. 어디 글 쓰는 사람만의 일일까. 자신감이 좀 붙으면, 예전에 두려워하던 이가 귀찮아지는 때가 오는 것이다. 그 무렵이 가장 바쁜 때다. 그러나 그것은 잘되고 있는 게 아니라 헤매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만 그것을 모른다.

 

+1941

여럿이 마시는 사람은 희망이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이고, 혼자 마시는 사람은 절망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일까. 전자가 결국 절망뿐임을 깨달으면 귀가하다 혼자서 한잔 더 할 것이고, 후자가 끝내 희망을 포기 못하겠으면 누군가를 불러내 한잔 더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신 것이 희망이건 절망이건, 자고 일어나면 남아 잇는 것은 부끄러움뿐일 때가 있다. 어젯밤 내가 느낀 감정들, 내가 과장해서 나 자신에게 제공한 그것들의 구겨진 포장지만 남아 있어서다. 대체로 희망과 절망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는 멀리' 있다. 현실의 대부분은 희망도 절망도 아닌 그냥 무명의 시간인 것이다.

 

+1942

<작은 큐브로 만든 집 la maison en petitscubes>. 해수면 상승으로 조금씩 물에 잠기는 마을. 많은 이가 떠났지만 주인공 독거노인은 때가 되면 아래층을 포기하고 새로 한 층을 올려 옮겨가는 식으로 버틴다. 어느 날 이사를 하다가 담배 파이프를 아래층으로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지르자, 노인은 아예 잠수 장비를 갖추고 그것을 찾으러 내려간다. 물건은 금방 찾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그곳에서 살던 때의 기억까지 떠올라 금방 다시 올라와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내처 계속 내려가보기로 결심한다. 더 깊은 과거의 추억 속으로. 말하자면 이런 은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래쪽에서 위로 점점 물이 차오르는 일이며 그렇게 한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지난 시간들은 수몰되는 집처럼 그 형태 그대로 가라앉는다.'

 

+1943

우리에게 매년 주어지는 365개의 나날들, 그것들 외에 또 어디에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1944

이 시(<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는 '캔-두 개인주의  can-do individuallism(나의 선택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에 대한 경의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축하려 할 때 범하게 되는 자기-기만 self-deception에 대한 논평이다."

 

+1945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1946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나란 무엇인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

 

+1947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그런 것들은 쓰나미만큼 자신의 '세계'에 별다른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충격을 받을 필요도 있다고 말이다.(심정명)

달라진 것(차이)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저널리즘만이 아니라 지식인을 자처하는 많은 이의 숙명이다.

 

+1948

불행도 새로운 것이 더 값져서, 이미 충분히 나빴던 것들이 더 나빠지는 변화는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1949

전화기나 야구공을 몇 번씩 바꿔 쥐듯이, 또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에 서듯이, 우리는 신체를 통해 이 세계와 최선의 방식으로 만나기를 원하며,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1950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에로스의 종말>과 함께 오늘날 '사랑의 위기'를 말하는 많은 사상가의 명단에 합류한다. 많은 이가 성공만을 보고 달려가는 '성과 주체'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자기 자신과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라는 것이다. 자기애에 빠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울증적 상태에 가깝다. 타자라는 존재의 의미를 모르고, 그의 다름을 견디지 못하며, 그것과 대면해야 할 상황을 피하는 주체다. 타자는 내 성공을 확인할 때나 필요한, 납작하고 투명한 거울에 불과하다.

 

+1951

 "입을 가리고, 코를 가리고, 세상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만큼만, 간단한 자살을 하자."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내가 없다는 느낌 속에서 실제로 나를 조금 없애보는 일이라는 것. 1986년생 일본 시인 사이하테 타히가 2014년에 출간한 시작 (<사랑이 아닌 것은 별>)에 실려 있는 <마스크의 시>다.

 

+1952

올해 들어 부모님의 가게는 월세를 못 내게 되었고 자신도 아르바이트에서 잘렸을지 모르지만, 취업이 불투명하고 연애 따위 안중에도 없었던 것은 그전부터다. 그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썼던 마스크라는 것. 모두가 마스크를 쓰자 '간단한 자살'들이 묻혀버렸을 뿐.

 

+1953

영화의 끝에서, 아제 거의 연인이 된 듯 보이는 두 사람은 '가장 짙은 블루'의 밤에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다시 큰 사고로 사람들이 죽으면 어떻게 할까? 모금을 하자. 그리고 '잘 잤습니다'와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살자." 재난 속에서도 타자의 존재를 잊지 않겠다는 것. 일상을 지키면서 그로부터 힘을 얻겠다는 것이다. 달리 뭘 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기세로 노래를 부르는 그 가수처럼, 사랑이라는 것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누구도 완전히 절망할 수 없게 만드는 이상한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일 같은 것이리라. 죽을 때까진, 살아가는 것이다.

 

+1954

한자어 '존재'가 '있는 자'이면서 '있음'  자체이기도 하듯이, 우리말 '임'도 '있는 자'로서의 '당신'을 뜻하면서 '~이다'의 명사형인 '임(있음)'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당신'을 위한 것이자, '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리라. '어떻게 있을(살) 것인가'에 관한 노래라는 것이다.

 

+1955

선잠 - 박준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1956

우리말 '보살피다'는 '살피다'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살피지 않으면 보살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살피는가? 다가올 시간이 초래할 결과를 살핀다는 것이다. 이런 보살핌을 우리는 돌봄이라 부른다. 돌봄이란 무엇인가.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가 걷게 될 길의 돌들을 골라내는 일이고,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를 아프게 할 어떤 말과 행동을 걸러내는 일이다.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번 더 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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