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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음악앨범

 

 

+201

6살 딸 아이의 유치원 운동회

아이를 업은 남편이 운동장을 돈다

비가 와도 뛰지 않던 남편이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구 한바퀴라도 돌 기세다

여자는 남편이 낯설다

13년간 알아온 그 남자가 맞나 싶다

 

남편은 어릴 적에 부모님을 여의고 외롭게 자랐다

아빠가 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부터 아이는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 아빠로 남편을 기억할 것이다

 

자리로 돌아오는 남편을 여자가

두 팔 벌려 맞이한다

남편의 땀냄새에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202

아파트에 장이 열리는 날엔

자전거를 파는 아저씨도 바쁘다

무료로 수리를 하러 오는 손님들이 많아서다

아파트 경비아저씨도 기다리셨다는 듯

낡은 자전거 한대를 끌고 나오셨다

자전거가 쓰러지자 아저씨가 껄껄껄 웃으신다

"자전거가 사람을 알아보나 봅니다

딱 내 앞에 와서 넘어지네"

경비아저씨는 미안한 표정이 됐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무료로 봉사하시는만큼

언젠가는 크게 복받으실 겁니다"

 

두분이 나누는 대화는

사심도, 의심도 없이 청량하다

기꺼이 수고를 감수하는 넉넉한 마음과

그걸 알아주고 고마워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여자는 대가를 바라지않고

무언가를 해본지가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이 든다

 

두 어르신의 정겨운 대화에

가을 한낮이 따뜻하게 익어간다

 

 

+203

삶은 밤을 깐다

어릴 적에 엄마가 밤까는 모습을 보면 묻곤 했었다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되지, 손 아프게 뭐하러 일일이 까?"

그때마다 엄마는 대답하셨다

"이렇게 까놓으면 식구들이 오며가며 쉽게 먹을 수 있잖아"

 

세상에는 들어가는 수고에 비해

효율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

엄마가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이 대개 그렇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세상 귀찮은 일에도 온 정성을 쏟는 사람

그녀가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204

남편은 주말마다 도서관에 간다

그곳에서 종일 수험생처럼 공부를 한다

얼마전 회사 승진에서 누락된 뒤

남편은 좀처럼 웃질 못했다

 

여자는 그런 남편을 위해

정성껏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에 간다

 

서가를 메운 책장 뒤로 남편의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한번도 자기인생에 소홀한 적이 없었던

성실한 남자의 뒷모습이 눈이 부시다

 

 

+205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며 나간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다

아마 봉투 안에 든 편지 때문일 것이다

 

며칠전 친정엄마가 짐정리를 하다가 발견했다며

편지꾸러미를 가져오셨다

발신지는 강원도 고성

20대 시절 옛 남자친구가 보내온 편지들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옛 추억이 왈칵하고 솟아졌다

돌아보니 그녀도 한때는 이토록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군기 바짝 든 이병이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편지 쓸 정도로

누군가에게는 하늘 아래 가장 그리운 사람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은 기억이 그녀를 따뜻하게 했다

 

남편은 40분이 지나서야 들어왔다

편지를 읽어봤냐 했더니 손을 가로젓는다

그러면서도 국이 짜다고 괜히 트집을 잡는다

잠시 옛사랑의 흔적이 지나간 어느 가을

무덤덤했던 부부의 저녁 식탁 위로

풋풋한 사랑의 기운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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