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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WKW)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

WKW 영화에 매혹되는 순간

[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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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는 감정을 제대로 끌어낸다. 거물처럼 보이고 싶은 창파의 뜨겁고도 어리석은 욕망부터 소화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유덕화의 눈에 비친 완전히 소진된 표정까지, 영화를 보는 우리는 모든 걸 생생하게 느낀다. 처음부터 왕가위는 최고의 연기를 어떻게 배우들에게 끌어낼지 알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유덕화의 눈에 익은 아슬아슬한 공허감과 장만옥의 다정함을 솜씨 좋게 대조시킨다. 그는 장만옥에게서 어떤 감독도 알아보지 못한 깊이와 재능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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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왕가위와 그의 부인 에스터)의 만남은 1970년대 카오룽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왕가위 영화 중 한 장면 같다. 두 사람은 청바지 가게에서 여름 아르바이트를 같이했다. 매일 열 시간씩 옆에서 일하다 서로 끌린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아무 진전도 없었다. 에스터는 왕가위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물어봐주길 기다렸으나 - 그냥 말해주기엔 자존심이 상했으므로 - 왕가위는 그녀의 기대를 계속 저버렸다. 그 시절에도 그는 지각생이었던 거다. 그러다 같이 일하는 마지막 날, 드디어 그가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 하지만 총 여섯 자리 숫자 중 다섯 개만 알려줄 거야. 나한테 전화하고 싶음 나머지 한 자리 정도는 스스로 노력해줘." 그녀는 전화를 목 빠지게 기다렸지만 왕가위는 3일 후에야 전화했다. 왜 3일이나 걸렸냐고 그녀가 묻자 세 번째 시도했을 때 제대로 된 전화번호를 맞췄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459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던 거처럼 왕가위는 사소해도 좋으니 일상의 한계를 벗어날 만큼 생생하고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력한 계시의 순간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시간의 파도를 타는 사람이다.

 

+460

그가 촬영한 홍콩은 다큐멘터리 기록이 아니라 어린 시절 홍콩을 처음 본 남자가 내놓을 법한 것이다. 다시 말해 허름하고 코딱지만 한 아파트와 국숫집, 북적이는 시장과 굉음을 내는 지하철을 실제보다 아름답게 포착한 - 또렷하게 빛나는 기억의 풍경이자 훌륭하게 재창조된 꿈 같은 - 장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461

어떤 상황도 아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오스트리아 작가 로베르트 무질이 말한 '대부분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의 그림자 속에서 인생 최고의 시간을 보낸다'는 신탁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다. 아비에게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란 자신을 버린 생모를 만나는 것이다.

 

+4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가위의 두 번째 영화가 대중적 취향과 여타 동료 감독들의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의 대담성은 그를 슈퍼스타 감독이 되는 길로 이끌었고 이 스타덤은 그의 주변 지형을 바꾸어놓게 된다.

 

+463

"저는 항상 배우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안전망이 돼줄 테니 걱정 말고 뛰어들어라. 그럼 내가 잡아주겠다'라고요." 그들은 그의 말을 믿는다. 장쯔이는 영화 <2046>과 <일대종사>로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탔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가끔 왕가위가 촬영 테이크를 반복해서 지시해도 그를 100퍼센트 믿고 간다고. 스무 번, 서른 번, 마흔 번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연기'를 멈추고 그 배역 자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양조위가 샴페인을 마시다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왕가위 감독은 저에게서 최고를 끌어낼 줄 아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다른 감독들은 날 겁내는 건지, 암튼 심하게 몰아봍이진 않아요. 혹시라도 내가 화낼까봐요. 그런데 그는 상관 안 합니다. 내가 스타란 사실도 개의치 않고요. 그와 일할 때는 맘에 안 드는 게 있어도 군말 않고 해야 돼요. 그리고 그 점이 맘에 듭니다."

 

+464

왕가위는 결코 최신 유행이라 부르는 것에 중독된 적이 없다.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판세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고 있어도 그는 본능을 따르고, 자신의 취향을 믿으며,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채택할 때도 새롭게 부품을 교체해서 자신만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진짜 쿨하다는 건 태도나 스타일이 아니며 라이프스타일은 더더욱 아니라는 걸 그는 안다. 그건 자신의 감각을 믿는 데 있다.

 

+465

장숙평은 프레임마다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했다.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떠올리게 하는 녹색 전등갓부터 '골드핀치 레스토랑'의 나뭇잎 무늬 벽지, 진 부인의 완벽한 헤어스타일(장만옥은 매일 몇 시간씩 공들여 머리를 펴고 세팅했다), 매번 다르게 입고 나와 단아함의 경지를 경신하는 치파오까지, 모두가 그런 노력의 소산이다. <중경삼림> 이후 자신들을 유명하게 만든 핸드헬드 촬영을 버린 왕가위는 이번엔 트래킹 촬영으로 카메라를 미끄러지게 했고, 그 결과 비좁은 아파트 건물 안에서 놀랍도록 훌륭한 동선의 시퀀스가 탄생했다. 극적인 폭발보다 주인공들의 이미지가 더 중심이 된다. 금빛으로 물든 장만옥의 가면처럼 완벽한 아름다움, 갈구하는 마음이 보이는 양조위의 사소하고 사적인 표정들이 그것이다. 주모운과 진 부인이 길에서 만났을 때 시간이 뒤틀려 느리게 움직이는 장면처럼 <화양연화>는 부드러운 각성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영화다. TV 시리즈 <매드맨>을 만든 매슈 와이너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영화의 모든 장면들이 인상적인 나머지, 자기 프로그램의 주인공 돈 드레이퍼가 등장하는 오프닝 - 시청자를 등지고 앉아 술을 마시는 -을 <화양연화>에 양조위가 나왔던 장면을 빌려와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시대극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벽지가 떨어져나가고 거리의 쓰레기가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현실에서 어떻게 관능을 창조할지 가르쳐주는 기준점"이라고 이 영화를 평한다.

 

+466

왕가위가 절대적으로 존경하는 - 혹시 조금이라도 부러워하는 -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의 미술감독이자 의상 디자이너 겸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이고 또한 영화 편집자, 까마득한 시절부터 왕가위의 제일 친한 친구이고 또 제일 중요한 협력자인 장숙평이다. 왕가위는 그를 '내 영화의 수호천사'라 부른다. 왕가위가 작가였던 시절, 그와 장숙평은 함께 술을 마시며 밤새 영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어떤 영화인이 맘에 드는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등을. 둘이 얼마나 잘 맞는지 바즈 루어만 감독과 그의 훌륭한 미술감독인 아내 캐서린 마틴 커플을 방불케 할 만큼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467

"왕가위가 아이디어를 말하면 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영감이 오기를 기다리며 걸어 다니죠. 저도 왕가위와 비슷합니다. 그냥 기다리거든요. 줄곧 기다리는 거죠. 출발점이 될 곳을 찾아야 해서 그렇습니다. 그게 잡지 표지가 될 수도 있고 한 벌의 재킷이 될 수도 있고 - 근데 옷이 출발점이 될 때가 많아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다 임자를 만나면 영화에 딱 맞을 거라는 감이 옵니다. 이유는 몰라요. <해피 투게더> 때는 그게 장국영이 입고 나왔던 갈색과 노란색의 스웨터 그리고 브라질 어느 공항에서 봤던 벽지였습니다. 어느 공항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그 벽지를 사진으로 찍었고 그걸 영화에 집어넣었죠."

 

+468

언젠가 그에게, 그의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괴짜 백만장자가 자기 입맛대로 저택 짓는 스타일을 연상시킨다고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건물 뒤에다 방을 추가하고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문을 닫고 본채에서 이상한 각도로 박공지붕을 올리는 식으로. "아닙니다. 그런 비유가 아니고, 이게 맞아요." 그는 종이에 꺼내 재빨리 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 "정원에 나무를 이렇게 심습니다. 심어놓고 내 정원의 완벽한 나무가 됐으면 하죠. 그런데 그 뒤에 무슨 일이 생깁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가지를 부러뜨린다든가 - <해피 투게더>를 찍고 있을 때 장국영이 사정상 일찍 떠나야 했던 것처럼- 하는. 그럼 이건 원래 바라던 모습의 나무가 아닌데 하면서 정원의 균형을 위해 여기에 관목을 하나 더 심습니다." 그는 나무 오른쪽에 덤불을 하나 슥슥 그려 넣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원하는 만큼 잘 자라지 않아요. 그래서 여기 또 저기에 꽃을 심죠. 하지만 둘 중 하나만 잘 피는 통에 다른 하나는 뽑아냅니다.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멈춥니다. 운이 좋다면 이때 보이는 결과가 아름답겠죠. 처음에 생각한 모습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정원이 완성되는 겁니다."

 

+469

할리우드 황금기의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왕가위는 영화배우가 발휘하는 로맨틱한 매력을 이해하고, 그 아우라를 화면에 포착하는 방법을 안다. 그러면서도 영화란 궁극적으로 풀롯이나 대화가 아니라 시와 진실과 감정의 덧없는 순간들을 잡아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 - <춘광사설>처럼 봄 햇살을 뚫고 들어와 평범한 것을 아름답게 바꾸어놓는-이란 진보적인 믿음 또한 갖고 있다. 광고의 얄팍한 눈요기식 예쁨, 진정한 예술은 부르주아 감성을 공격해야 한다는, 이제는 실종된 아방가르드식 믿음, 이런 것들 때문에 아름다움에 회의적이거나 심지어 아름다움을 의심하는 요즘 세상에 왕가위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영화를 만든다.

 

+470

어느날 밤, 우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옛날 영화 특유의 꿈결 같은 장면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아름답게 찍히는 게 너무 신기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아시겠지만 아름다운 걸 좋아해서 그렇게 찍는 게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찍는 겁니다." 

 

+471

읽는 것과 쓰는 건 완전히 다른 분야입니다. 쓴다는 건 아이디어와 기술이 있어야 되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다잡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첫 단어를 끄집어내는 고통은 엄청나죠.

 

+472

생각해보세요. 지금껏 수십 년 동안 촬영 전에, 촬영 중에, 촬영 후에도 그렇게 미친놈처럼 써댔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절더러 대본 없이 찍는 감독이라 그러잖습니까!

 

+473

원칙적으로 영화는 촬영하는 첫날부터 어차피 계속 굴러가게 되는 시스템이고, 실제 촬영 현장에는 늘 무질서, 혼돈,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촬영장에서 완벽한 날이란 드물기 때문에 그 사실부터 받아들이는 게 최우선입니다.

 

+474

그날은 첫날 이었다는데 걱정은 안 됐습니까? 신인 감독인데 시나리오도 없이 일한다는 게.

중요한 건 제가 작가였다는 겁니다. 제가 시나리오였던 거죠. 저는 배우들한테 뭘 하라고. 뭘 말하라고. 심지어 어떻게 말하라고 지시할 수가 있었어요. 마음 속으로 이미 내용을 알고 있으니까. 고쳐야 할 상황이 오면 직접 고쳤습니다. 배우 대사가 너무 길다. 이 장면은 답이 안 나온다. 현장이 준비가 안돼있다 등등 뭐든지 해당되면 다. 저는 늘 시나리오를 고쳤고 그러다 보니 촬영 중에 밤마다 미친 듯이 쓰고 있었어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만들기 시작한 지 2주 만에 완전히 만신창이가 됐죠. 눈이 얼마나 뻑뻑하던지, 전 생각할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우린 일종의 모험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겁을 먹어선 안 됐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475

장학우는 제가 썼던 한 코미디에 출연하면서 같이 일한 적이 있었는데 창파 역을 맡기에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에게 딱 맞는 역이었죠. 그는 노래자랑대회 우승자 출신 가수였고, 그렇게 시작해 인기 절정이었다가, 성공에 서투른 탓에 음주 문제나 기타 말썽을 일으키면서 평판이 나빠졌습니다.

 

+476

<열혈남아>의 경우 장만옥의 얼굴을 봤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깡패들 세상과는 이 얼마나 다른 얼굴인가. 좋은 조합이 되겠어."

 

+477

제가 걸음걸이를 정말 좋하하는 사람이 둘이 있는데 한 명이 왕페이, 다른 한 명이 장만옥이에요.-그녀한테 "그대로 계속 걸어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달까. 그때 그녀가 걸어 다니며 보여주는 사소한 움직임이 대사보다 더 많은 걸 말해주더군요. 그때부터 처음 써놨던 페이지들을 다 버렸습니다. 대사를 더 짧게 만들고 배역을 그녀에 맞게 고쳤죠. 그랬더니 그녀더러 다른 사람이 되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녀도 그 역에 완벽한 배우가 됐고요. 이 경험으로 뭔가를 깨우치게 됐고 그 이후로 이 경험은 유용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478

그(유덕화)는 진정한 연예인이고 자기 이미지에 맞게 현실을 살아가는 일이 전혀 괴롭지 않은 타입이에요.

 

+479

이 영화는 - 그리고 감독님의 경력도 - 왼쪽에는 홍콩 거리가, 오른쪽에는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 장면을 내보내는 TV 화면에 그 홍콩 거리가 되비친 모습이 담긴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장숙평은 이게 의도적인 연출이라고 하던데 왜 그런 장면으로 시작하신 겁니까?

그 장면을 의도하진 않았어요. 우연히 건진 겁니다. 장학우가 갑자기 튀어나와 몽콕 거리를 냅다 뛰어가던 장면 기억하시죠? 몽콕은 홍콩에서 제일 붐비는 구역이라 거기서 촬영 허가를 받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게 많은 엑스트라를 쓰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래도 우리는 모험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은행 강도처럼 플랜을 짰습니다. 카메라를 배치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고 한 번에 오케이가 나야 했죠.(웃음) 전 그런 극적인 드라마가 좋습니다. 그럴 때 팀 전체가 바짝 몰입하고 신난 상태가 되거든요. 어쨌든 모든 준비는 다 됐습니다. 하지만 거리가 붐빌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요. 그때 거기 TV로 이루어진 벽 - 홍콩을 신주쿠처럼 보이게 하려고 설치한 - 이 있고, 마침 나오는 장면이 구름이라는 걸 알아챘죠. "저거 잘 어울리겠는데"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 밖의 세상에서도 알아볼 표식이 있어야 되거든요. 이건 구조상 중요한 문젭니다. 제 영화들은 대부분 이 표식을 갖고 있습니다. <아비정전>에서는 숲이 있었고 <해피 투게더>에선 폭포가 있었죠. <화양연화>에서는 그 골목들이 있었습니다. 제 영화는 관계와 분위기와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것들은 영화 안에서 늘 변합니다. 하지만 숲, 사막, 폭포 이런 요소들은 변하지 않는 상수가 되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나란히 두는 게 좋아요.

 

+480

<아비정전>은 감독님의 개성이 드러난 첫 영화입니다. "저번 영화가 성공했으니까 이젠 진짜 원하는 걸 찍을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셨나요. 아니면 히트작을 또 하나 만든다고 생각하셨나요?

만들 때는 그게 히트작이 될지 어떨지 고려한 바가 없어요. 그건 <열혈남아> 때도 마찬가지였고, 전 그저 "영화만 좋으면 사람들이 싫어할 이유가 뭐 있겠어?" 그렇게만 생각했지.

 

+481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뭡니까?

이런 시대물을 찍으려면 돈이 많이 들죠. 그래서 저는 코폴라가 했던 방법을 써보기로 하고 두 편으로 영화를 쪼갰습니다. 그 둘이 서로 연속으로 이어지도록. 첫 이야기는 폭동이 있기 전인 1960년을, 그다음 이야기는 폭동 직후인 1966년을 배경으로 했습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저도 제일 날 나가는 10대 아이돌 스타로 이루어진 꿈의 출연진을 불러 모았어요. 그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한쪽은 상하이 출신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장국영, 장만옥, 유가령,. 다른 그룹은 홍콩 토착 거주민들인 유덕화, 양조위, 장학우로. 줄거리는 그들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이뤄질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한창 남미문학에 빠져 있던 때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영감을 가져왔죠. 저에게 장국영의 배역은 콜레라처럼 두 여자의 인생을 바꿔버리는 전염병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그를 만나기 전과 후 그녀들의 시각에서 서술됩니다. 첫 번째 편에서 한 여자는 자신의 과거를 잊길 거부합니다. 두 번째 편에서 다른 또 한 여자는 과거를 기억하길 거부하고요.

 

+482

감독님이 그토록 좋아하는 남미소설이란 게 대체 어떻길래? 미누엘 푸익과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자주 언급하시는데.

중국문학에선 모든 게 '무엇'-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 - 에 관해서고 '어떻게'에 대한 건 별로 없습니다. 남미소설에서 배운 건 작가들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어떻게'도 '무엇'만큼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사실 '어떻게'는 '무엇'이 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요. 그런 걸 하고 싶었어요. 중국영화를 위한 완전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을.

 

+483

거기서 장국영을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스타예요. 스타는 배우와 다릅니다. 스타는 이런 사람이죠.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일단 내가 촬영 현장에 나타나면 다 나를 주목해야 해.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야'. 그런데 오늘 당신은 그걸 못 보여줬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한다는 걸. 또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는 걸 저는 압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현장에서 항상 그런 느낌을 내게 전달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 쇼의 주인공이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해요." 그러자 그가 대답하더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곧 그는 그 대답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죠.

 

+484

하지만 그 역시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장국영 걸음, 장국영 미소, 장국영 고개 돌리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모두 아는 그 첫 장면을 촬영 첫날에 찍었는데 저는 그의 걸음걸이부터 손댔어요. 배우들과 일할 때 항상 거기서부터 시작하거든요. 그럼 그들은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일주일을 그냥 걷기만 했네! 왜죠?" "왜냐하면 이 영화에 맞는 분위기와 리듬을 당신이 찾아야 되니까. 나로선 이게 영화 속 그 인물이 걷는 거란 확신이 들어야 돼요. 당신이 걷는 건 안 봐도 돼. 이 인물이 걷는 걸 보고 싶다고."

 

+485

장숙평과 그의 팀도 우리가 앞쪽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그 다음 촬영 세트를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런데 세트 하나 준비하는 데 장숙평이 그렇게 시간을 오래 들일 거라고는 예상을 못한 겁니다. 빨리 빨리 진행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세트 만드는 걸 보니 앞이 캄캄하더군요. "제길, 스케줄 짠 거 다 버려야겠어. 그렇게 저는 모든 걸 다시 구성해야 했습니다.

 

+486

이 영화는 그 친구한테 개인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디테일 하나하나가 제대로 살아 있는지 확실히 하고 싶어 했죠. 저는 그런 태도를 존중했습니다. 배우들이 "머리 분장하는 데 여덟 시간이나 걸리는 건 미친 짓"이라며 불평할 때도 저는 이랬습니다. "장숙평이 그만큼 든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야지." 그가 신경 쓰는 문제는 저도 신경 쓰게 됐어요. 그건 결국 영화를 위해서란 걸 알았으니까요. 그와 나의 알량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487

전 영화를 만들 때 만나는 돌발 요소들을 믿는 쪽입니다. 전 리듬감이 꽤 좋은 편이에요. <아비정전> 마지막에 양조위가 도박장에 갈 준비를 하는 장면에서 전 그의 동선을 음악과 맞추지 않았어요. 이 장면에서 사비에르 쿠가트의 곡을 쓰게 될지도 그땐 몰랐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곡을 이 장면에 입히자 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어요. 그가 걸어나가면서 음악도 끝이 났고 그대로 우린 화면을 암전시킬 수 있었죠. 끝내줬습니다. 이런 경험이 이 외에도 정말 많았어요.

 

+488

모든 영화마다 음악을 쓰셨고 놀랄 만큼 전면에 내세우셨죠. 배경음악으로 빠지는 경우가 좀처럼 없습니다. <중경삼림>에서는 <캘리포니아 드리밍>과 제 아내가 싫어하는 레게 곡 <인생이란(Things in Life)>을 계속 트셨잖아요. 몇 번 씩이나.

그 곡을 어디서 가져왔는 지 잊었지만 전 그 노래 좋아해요. 임청하가 맡은 배역의 느낌을 잡아주거든요.

그걸 보니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긴 이별>에서 주제가를 쓴 방식이 떠오르던데.

반복은 자기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방법입니다. 어떤 음악을 틀고 또 틀며 반복하면- 그것도 매번 아주 길게 - 그 곡은 배경음악이 아니라 주제가가 됩니다. 하지만 음악은 변하지 않더라도 캐릭터는 변해요. 펠리니가 이런 말을 했죠. "변하지 않는 것을 통해 변화를 보여주라"고. 노래는 때로 단순 음악 그 이상이 됩니다. <중경삼림>에선 우연으로 시작됐죠. 그때 우리는 란콰이퐁에 있는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 스낵바에서 촬영하고 있었는데, 그 반대편에 캘리포니아 요리를 파는 '캘리포니아'란 레스토랑이 있었어요. 전 생각했죠. "이거다. <캘리포니아 드리밍>" 나중에 저는 이 노래를 생각 없이 그냥 택한 게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왜냐하면 왕페이의 캐릭터에 숨은 의미를 부여하는 노래였으니까요. 그 시절 홍콩 사람들 사이에선 이민 이야기가 많이 오갔지만 왕페이가 맡은 소녀에게 캘리포니아는 여권이나 이민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그곳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경험 혹은 가능성이란 의미가 있었어요.

 

+489

바로 그겁니다. 안토니아니 감독한테서 배운 방법이었죠. 그는 <태양은 외로워>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물은 하나도 안 비추고 오직 두 남녀 주인공이 찾곤 했던 광장의 텅 빈 모습만을 긴 몽타주로 보여줍니다. 그가 나중에 인터뷰에서 설명하기를 자신에게는 그 장소가 목격자와 같아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영화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한 커풀의 연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엔딩 대신 목격자 시선으로 옮겨간 겁니다. 정말 신선했어요.

 

+490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여는 첫 문장에서 한 남자가 과거 시점에서 미래를 상상하는데, 그게 실은 현재 상황이거든요. 저는 그걸 영화로 옮기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저 유명한 약속. 즉 중국 반환이 이루어진 뒤에도 홍콩은 이후 50년 동안 변하지 않을 거란 말을 시작점으로 삼았어요. 이 약속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 흥미롭겠다 생각했죠. 일종의 은유로. 저는 도시가 50년 동안 변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해보려고 했습니다. 그게 영화의 궁극적인 핵심입니다. <화양연화>를 찍을 때 호텔 방 호수를 정하라길래 제가 2046호라고 했죠.

2046호라고 했을 때 97년 반환 후 50년째가 되는 해를 생각하고 계셨다는 건가요?

그냥 그 숫자가 입에서 튀어나왔어요. 다음 영화로 벌써 <2046>을 기획하고 있어으니, 까짓거 왜 못 쓰겠나 싶었지.

 

+491

사람들이 <2046>은 기억 혹은 노스텔지어에 대한 영화라고 말합니다. 이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이 영화는 놓아주기에 관한 영화입니다. 어떤 면에서 기억은 홍콩에게 저주에요. 1997년 이후로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게 됐고, 그래서 앞을 바라보는 대신 과거에 머무는 쪽을 더 원하게 됐습니다. 참 심란한 상황이죠.

 

+492

전 스타들을 보는 게 좋거든요. <아비정전> 찍을 때 유덕화가 이랬어요. "연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연기자가 아닌 일반인을 쓰시지 그래요." 그때 대답했지. "그건 달라. 일반인이 나온 영화를 보는 것과 '연기하지 않는' 스타가 나온 영화를 보는 건 완전히 별개의 경험이라고." 저는 영화가 현실보다 과장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평범한 사람을 찍을 때조차도, 예를 들면 이 영화들 속 아핑처럼요. 그럴 때도 감독님은 그들에게 빛을 부여해서 그들이 실제보다 훨씬 잘나 보입니다. 

저는 제 영화속 인물들을 좋아합니다. 자기 영화 속 인물들을 좋아하면 그들을 보는 시각도 다정해지죠. 저는 영화를 보면 감독이 이 영화 속 배우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보입니다. 다 드러나요. 턱이 두 겹으로 찍히고, 조명을 못 받고 그런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포괄적인 어떤 것입니다. 즉 다정함이 없다는 것. 저는 캐릭터들과 함게 있고 싶지 그들 위에 군림하고 싶지 않아요. <타락천사>에서 제 문제점 중 하나가 뭐였냐면 여명과 이가흔과 어떻게 함께 있어야 좋을지를 몰랐다는 겁니다.

 

+493

사실 최고의 대사는 두드러지지 않는 대삽니다. 개인적인 선언 같은 게 아니라 그 배역한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그런 말들이죠. 그게 다 제가 TV방송 출신이라 그렇습니다. TV는 대사와 플롯이 전부 다라서. 하지만 영화는 대사와 플롯에 대한 게 아니죠. 영화는 행동에 대한 겁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보다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을 많이 알게 됩니다. 말에는 거짓이 포함될 수 있으니까요.

 

+494

<중경삼림> 후로 영어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가끔 에이전트나 프로듀서가 "혹시 이거 하고 싶어?" 하면서 저에게 시나리오를 보내줬고 대부분은 구미가 안 당겼어요. 저는 시나리오 읽을 때면 제일 처음 떠올리는 질문이 '누가 출연할 거냐'는 겁니다. 언젠가는 프로듀서 하나가 니콜 키드먼과 영화를 찍고 싶냐길래 예스라고 대답했죠. 그래서 만남이 주선됐고, 베벌리 힐스 호텔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정말 우아하더군요. 그녀는 제 스타일을 이해했고 제일 중요한 기본적인 질문만 했어요. 저는 그녀에게 막연한 영화 아이디어를 설명했습니다. - 대충 상하이에 사는 러시아 출신 이민자가 혁명 후에 뉴욕으로 건너가, 혁명 중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러시아 귀족에게 복수한다는 내용. 제목은 일단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라고 했지만 이미 유명한 영화 제목이기도 했죠. 오손 웰즈가 전화박스 안에서 프로듀서와 통화하다가 다음에 만들 영화 제목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정한 게 없었거든요. 그때 근처 가판대에 진열된 싸구려 소설 한 권이 눈에 들어와요. 그래서 그 책 제목을 갖다 씁니다.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라고. 저도 그걸 따라한 거고요. 니콜 키드먼은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 했고 프로젝트를 수락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을 올려서 우리는 스튜디오 카날 측에 이 프로젝트를 선판매했어요. 가제와 '위험에 빠진 위험한 여인'이란 단 네 글자로 된 초간단한 개요만 보여주고서요. 그런 후 저는 뉴욕으로 가 6개월 동안 초창기 러시아 이민자들에 대한 자료조사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아보며 뉴욕공공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죠.

가만 보면 자료조사 과정을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아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어요. 제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오로지 자료조사하는 게 좋아서라고.(웃음) 그 과정이 진짜 너무 좋아. 돈 받고 지식을 쌓는 거잖아.

 

+495

여기서 잠깐 감독님이 애착을 보이는 테네시 윌리엄스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중경삼림>에서 감독님은 임청하에게 블랑시 뒤부아 연기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마이 블루베리 나이트)에선 레이첼 와이즈로 하여금 통으로 테네시 윌리엄스를 소환하신 부분이 나와요.

<아비정전>에서 날개 없는 새 이야기를 하는 장국영의 작업 멘트도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에 나오는 겁니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제가 특히 사랑하는 미국 극작가에요. 언젠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중국어판으로 만들려는 시도까지 계획했죠. 공리한테 블랑시를. 강문한테 스탠리를 맡겨서!

저 지금 살짝 놀랐습니다. 그 말씀에.

제가 좋아하는 윌리엄스의 특징이란, 날 것입니다. 펄펄 살아 있죠. 그의 작품들이 분노하고 무모하긴 해도 절대 차갑진 않아요. 열기가 느껴지고, 고통이 느껴지고, 지혜가 느껴집니다. 저는 차가운 선명함을 좋아하지 않아요. 엉망진창인 따뜻함이 좋습니다.

 

+496

일단 제 의도가 전달이 안됐다면 실패의 원인이 뭔지 찾아봐야 됩니다. 이소룡이 언젠가 자신의 기술에 대해 이런 말을 했던 거처럼요. '거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정받는 과정의 일부다.' 전 사람 때리는 취미 없어요. 나 자신을 쳤으면 쳤지.

 

+497

허우 샤오센 감독의 <비정성시>를 보면 이렇게 돼요. "우와, 이 감독은 전부 다 파악하고 있네. 심지어 배경에 나오는 엑스트라들 사연까지 다."

 

+498

저는 그 거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이 진짜처럼 느껴지게끔. 조감독한테 맡기거나 엑스트라들이 아무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도록 놔두기보다 제가 직접 구성합니다. 진이 빠지는 작업이지만 좋아하는 작업이기도 해요.

 

+499

그(양조위)의 <아비정전> 촬영 첫날은 저 악명 놓은 구룡채성 지구 안의 아파트에서 진행됐습니다. 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 장만옥에게 인사하는 장면이었는데 클로즈업 컷은 쉬웠지만 롱 숏은 오케이 컷이 날 때까지 32회나 찍어야 했어요. 양조위로선 한 장면을 그렇게 많이 찍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는 완전히 충격받아서 촬영이 끝나자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뜨더군요. 유가령이 나중에 전해주길 당시 남자친구였던 그가 화를 많이 냈답니다. 자기를 혹독하게 다뤘고 원하는 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고. 그 일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가 그날 밤에 잠도 못 잤다나!(웃음) 그래서 양조위를 초대해서 그날 러시 필름을 보여주며 각각의 테이크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납득시켰죠. 저는 이렇게 말했스니다. "영화에서는 연기하는 방식을 바꿔야 돼. 영화는 TV랑 달라. 얼굴만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가 담겨. 그러니까 몸 전체가 연기를 해야 해."

그를 훈련시킨 건가요?

방향만 다시 잡아준 것뿐입니다. 사실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은 그에게는 도전이었어요. 대사도 없고, 클로즈업도 없고, 오로지 동작뿐이었거든요. 도박사라는 존재를 보여주는 장면인데, 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넌 지금 도박사를 연기하는 거지. 그의 호주머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나?"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가 날 쳐다봤습니다. 전 탁자 위에 이런 것들을 죽 늘어놨어요. "포커게임을 하러 갈 거기 때문에 일단 카드가 두 세트." 이건 프로 도박사한테서 직접 알아낸 팁이었죠. "그리고 돈. 근데 이 돈은 그냥 돈이 아냐. 넌 돈에 관해선 철저하기 때문에 지폐를 뭉치로 둥글게 말아서 준비해놓을 거야. 그런 다음엔 동전. 그리고 담배. 담배는 두 갑이야. 왜냐하면 밤새도록 판을 안 떠날 거니까. 그리고 이건 빗." 그가 묻더군요. "빗은 왜 있는 거죠?" "그때는 도박사들이 도박하러 클럽을 가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 그때는 일반 결혼식장에 갔어. 결혼식에선 늘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피로연 시간 전후로 마작과 포커게임을 했거든. 진짜 '꾼'들은 하객인 양 참석해서 판에 끼어 않아 기술을 이용해서 돈을 따고 또 다음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지. 그러니까 그럴듯하게 말쑥한 차림이어야 해." 최종적으로 이렇게 정리를 해줬습니다. "이 남자는 아주 철두철미한 성격이고 말쑥하게 잘 차려입어야 해. 손가락도 청결해야 하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죠. "이 모든 걸 한 장면으로. 네가 맡은 캐릭터가 외출하기 전 준비하는 동선을 찍을 거야. 방금 보여준 이 물건들을 전부 네 호주머니에 챙기되, 순서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그런 방식으로 그는 자기 몸 전체를 염두에 둔 연기를 펼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양조위가 연기를 시작했을 때 전 NG를 날렸습니다. "그러면 안 돼. 넌 이게 기계적인 행위라는 걸 보여줘야 해. 매일 일과처럼. 습관처럼 하는 일이란 걸." 그 말을 듣고 그가 다시 연기했습니다. 저는 "이번 건 좋아. 하지만 지금부턴 담배를 물고 다시 해봐"라고 했고, 그는 멋들어지게 잘해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부터 쭉 이후 하게 되는 영화마다 전부. 양조위는 저한테 이렇게 묻게 됐습니다. "내 호주머니에는 뭐가 들어갑니까?"

그래서 <화양연화>를 할 때도.

그는 주의를 기울였죠. 이렇게 물었어요. "담배 한 갑 넣을까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 담배 케이스에 따로 옮겨서. 그리고 성냥 말고 라이터로" 만년필도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엔 작가들이 만년필에 신경을 썼거든요. 혹시라도 돈이 떨어졌는데, 갖고 있는 만년필이 예를 들어 파커61 모델처럼 아주 고급이면 식당에 "돈은 내일 주러 오겠소"라 말하며 그걸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만년필은 30달러쯤 했는데 사정이 급할 때 저녁 한 끼 값 정도는 댈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이런 외적인 세부사항들은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어쩌다 날이 너무 더워지면 대부분의 배우들은 입고 있던 의상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데, 전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배우라면 모름지기 <일대종사>의 비 오는 첫 장면을 찍던 양조위 같아야 해요. 그때 그는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너무 춥고 물 천지인 상황이라 그 안에 잠수복도 입은 상태였죠. 하지만 절대 자리에 앉지 않았습니다. 촬영 현장이었던 길거리는 거의 15센티미터 깊이의 물로 첨벙거렸는데 그는 뒷짐을 진 채 밤새 서서 버텼습니다. 중국 본토 출신인 다른 배우들이 혀를 내두르며 그에게 이유를 물었어요. "지금 내가 이 의상을 벗으면 나중에 다시 입힐 때 얼마나 일이 많겠나. 또 만약 앉으면 옷에 주름이 가니까 절대 앉지 않을 거다." 정말 인상적인 태도였고 그는 다른 배우들의 귀감이 됐어요.

 

+500

영화를 만든 30년 가까운 세월을 300페이지 책 한 권과 맞바꾼다는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발상인지. 이 책을 수락한 건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어요. 제 아들이 올해 스물한 살이 됩니다. 소년 시절을 뒤로 하고 성인이 되는 거죠. 아들과 아들이 보낸 유년기에. WKW로 대표되는 왕가위의 의미는 '부재'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엔 제 직업적 경력이 만들어낸 스펙터클에 그 애를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보호하려 했던 거였지만, 나중엔 그 애 자신이 사람들의 시선을 원하지 않더라고요. 제 영화 중에서 그 앤 <일대종사>와 <화양연화>밖에 안 봣습니다. 혹시 그 애가 나머지를 볼 날이 오면 저는 그 영화들을 자기 형제와 누이로 맞아주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어떤 면에선 아들도, 그 영화들도 함께 자란 셈이니까. 그리고 모든 형제와 누이들이 그런 것처럼 어떤 아이는 잘되고 또 어떤 아이는 잘 안 되고, 일부는 뒤늦게 좋은 결실을 보기도 하고 그런 거죠. 이 모든 형제 누이들의 공통점을 혹시 이 책이 그 애에게 알려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인생을 살면서 - 뭐든 대담한 시도를 하려면 - 한 번쯤 해야 하는 이 말 한마디에서 태어났다고. 그래.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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