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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일 : How to write a sent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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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퇴근하는 길에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진행자는 전설의 여배우 조안 크로포트(193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하던 여배우이자 댄서-옮긴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크로포드는 집을 나설 때마다 시사회장에 참석하거나 사디스 같은 고급 식당에 가는 사람처럼 옷을 차려입는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하던 기자가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꾸한다. "옆집 여자가 보고 싶으면 옆집으로 가세요." 조안 크로포드의 생각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다. 자신 같은 스타가 스타 행색으로 다니는 것이 팬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로 다가간다는 통찰은 일견 당연하니까.(그나저나 요즘은 파파라치 덕분인지 모르지만 세탁물을 찾아가는 스타들의 모습까지 구경하게 되었으니 크로포드가 활동하던 시절 이후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정작 놀라운 점은 크로포드가 그러한 통찰을 맛깔난 문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옆집으로 가세요'라는 짤막한 문장의 간결한 속도감은 '옆집 여자'라는 진부한 단어를 끌어다, '옆집'은 매력적인 여자를 찾아서는 안 되는 흔해빠진 현실 공간이라는 사실을 예리하게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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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음미하는 능력과 빚어내는 능력은 서로 접점 없이 따로 굴러간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 이들은 나란히 습득되는 능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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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보고 감탄한 이유를 분석함으로써 문장의 메커니즘까지 알게 된다면 어느 정도 비슷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길로 한 걸음 더 들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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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쓸 때 해야 할 첫 질문은 바로 이거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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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의 첫문장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요. 지혜의 시절이자 어리석음의 시절이었으며, 믿음의 세월이자 회의의 세월이요,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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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의 마지막 문장이 발휘하는 수사적 효과 또한 리듬감에 따른 것이지만 느낌은 좀 다르다. "그렇게 우리는 물살을 거슬러 배를 저어간다. 매번 물살에 밀려 과거로 되돌아가면서도."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제이 개츠비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회상한다. 미래는 개츠비가 선망하는 대상인 데이지 뷰캐넌과 그녀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그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캐러웨이는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매년 우리 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약속의 땅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이 마지막 문장은 '매번', '물살에', '밀려'라는 단어의 리듬감으로, 아무리 속도를 내려 해도 제자리 뛰기에 불과한 우리의 생을 표상한다.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기를 쓰지만 인생과 문장의 물살은 끝없이 뒤로 흘러 그를 다시 과거로 데려다 놓는다. 의미심장하게도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표현을 끝부분에 배치한다. 종국에 가서 인간은 다시 과거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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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필립 시드니Philip Sidney의 <시를 위한 변론 An Apology for Poetry>(1595) 속 문장을 소개한다. 문장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뿐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말해준다

누구인가? 안키세스를 업고 가는 아이네이아스를 읽고도 그것이 자기 운명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는. 덕망 있는 행실을 실행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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