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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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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술 +896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897 안 그래도 비참한데 뻔하기까지 한 건 싫었다. 그냥 그때는 이렇게 힘들어도 티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꿋꿋하게 '어른다운 방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그 기분이, 세상에서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어렸다. 매우 어렸다. 빈 주머니에 그런 쓸데없는 똥자존심이라도 욱여넣어야 할 정도로. '감춤'으로써 그것은 나만 아는 은밀한 성장처럼 느껴졌다. +898 들어봤지만 들어본 적 없는 소리. 술이었다. 주류 코너에 즐비하게 놓인 ..
건축가 서현의 세모난 집 짓기 [밑줄] +882 집은 어렵다. 설계하기도 짓기도 어렵다. 그리고 살짝 귀뜀하거니와 살기도 어렵다. 집은 바지런한 자들에게 맞는 주거 유형이다. 아파트는 나태한 자들에게도 생존을 보장해준다. 오히려 나태를 적극적으로 권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편함을 근면으로 기꺼이 극복하고 그 가치를 음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집을 짓겠다고 나선다. +883 건축가로서 집을 짓는 일은 곧 거기 살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이다. 사람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라고 했다. 집 짓기가 어려운 이유는 거주자들의 삶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는 작은 집일수록 더 그렇다. 집은 크기는 작아도 사람 사는 건물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넣어야 한다. 짓는 데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여기..
엘리먼트 [밑줄] +863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건 신나는 일이죠. 실력이 향상될수록 '오, 드디어 내가 생각했던 대로 좀 그려지는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즐거운 일이었어요." - 의 제작자 매트 그로닝 Matt Groening +864 "인생의 초기에 자신이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전환이 인생의 승패를 바꾸어 놓게 되니까요." -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Paul Samuelson +865 "당신은 키보드를 연주하는 것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죠. 정말 그걸 하고 싶었다면 이미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 잘 연주하기 위해 공연 시간 외에 하루 평균 3~4시간 이상을 연습한다고 말했다. 그는 7살 때부터 꾸준히 그렇게 연습해왔다. 그 이야기를..
9번의 일 [밑줄] +862 사람을 온전히 담을 만큼 큰 직업은 없다 - 스터즈 터클의 중에서 ---------------------------------------------------------------------------------------------------------------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이 자신일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더 이상 자신의 일이 아닐 때, 난 어떻게 달라질까 막연히 닥치면 살아지리라 하던 삶은 과연 지나온 삶보다 더 나은 삶의 모습이 될 수 있을까 내려놓음이나 받아들임 같은 체념의 마음이 아닌 해왔던 '일'과 다른 '일'로 얼마든지 바꿔 담을 수 있을만큼 나라는 그릇은 담대한지 질문하게 된다 다르게 질문하자면, '일' 이외의 '자존'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생의 ..
문장의 일 : How to write a sentence [밑줄] +855 하루는 퇴근하는 길에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진행자는 전설의 여배우 조안 크로포트(193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하던 여배우이자 댄서-옮긴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크로포드는 집을 나설 때마다 시사회장에 참석하거나 사디스 같은 고급 식당에 가는 사람처럼 옷을 차려입는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하던 기자가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꾸한다. "옆집 여자가 보고 싶으면 옆집으로 가세요." 조안 크로포드의 생각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다. 자신 같은 스타가 스타 행색으로 다니는 것이 팬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로 다가간다는 통찰은 일견 당연하니까.(그나저나 요즘은 파파라치 덕분인지 모르지만 세탁물을 찾아가는 스타들의 모습까지 구경하게 되었으니 크로포드가 활동하던 시절 이후 세상 ..
히치콕과의 대화 [밑줄] +816 공포를 영화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이 사람은 정작 그 자신은 아주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나는 그의 이러한 특질이 그의 성공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경력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배우, 제작자, 기술자 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필요를 느꼈다. 그들의 사소한 실수나 변덕이 작품의 통일성을 해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 모두는 감독에게 위험물로 여겨진다. 배우들이 전혀 질문할 필요가 없는 감독이 되는 것, 감독 자신이 제작자가 되는 것, 그리고 기술자보다 기술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보다 스스로를 더 잘 방어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817 감독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은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영화 전체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
2019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밑줄]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_윤이형 +808 그들은 훗날 가끔 생각했다. 그렇게 고단하고 힘겨운 상황에서 악역까지 맡는 일을, 그들은 각자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더 나쁜 사람, 가해자가 되는 일을, 희은도 정민도.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두 사람 안에 원래 내재해 있던 영혼의 좋은 부분, 선의와 호의, 배려심 들과 악당이 되기 싫다는 욕망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한 일이었다. +809 그는 점점 벌어져가는 희은과의 사회적 격차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희은을 배려하는 것으로 그 부분을 메우고자 했다. 그는 마지막 한 방울의 시간까지 희은에게 내주었다. +810 희은은 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경험한 답이 만족스럽지 ..
페터춤토르 분위기 ATMOSPHERES [밑줄] +786 분위기는 나의 스타일이다 J.M.W.터너가 존 러스킨에게 보낸 편지(1844) +787 우리가 말하는 건축의 질은 무엇인가? 건축의 질이란, 적어도 나에게는, 건축 가이드북이나 건축사에 누군가의 건축에 포함되거나 내 작품이 출판물에 수록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 질 높은 건축은 나를 감동시키는 건물이다. 무엇이 나를 감동시키는가? 어떻게 그 감동을 작업에 적용하는가?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분위기다. +788 우리는 심리적 감성으로 분위기를 감지한다.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작동하는 지각력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마음에 드는 것을 결정하거나 가던 방향을 돌리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항상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결정의 순간에 우리 내면의 무언가가 재빨리..
평소의 발견 [밑줄] +750 필요 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능력 이상으로 많은 일들을 쳐내기 위해 책상에 앉아 있는 세상의 치약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뭘까요? 저는 그것이, '평소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751 짜냄의 시대에 굴하지 않고, 치약이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보려 합니다 +752 평범하지만, 시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우리의 인생은. +753 톨스토이는 소설 를 쓰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가장 감동적인 글은 필자가 말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때 나온다 +754 내가 읽는 이의 감정을 짜내는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더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시간을 들이기 전에, 부사와 형용사 뒤에 숨으려 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게 되었거든요. 아이디어를 내면서 자꾸 뭔가를 더하..
센스의 재발견 [밑줄] +737 '일본에서 가장 잘 팔리는 옷'은 데이터를 뽑으면 어느 정도 수치화할 수 있지만, 그 옷을 입는다고 센스가 좋아지지 않는다. 디자이너 컬렉션이나 명품 옷을 입는다고 센스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을 것이다. +738 센스가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평범함'이라는 감각이 뜻밖에 중요하다. 아니 평범함이야말로 '센스가 좋다/나쁘다'를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739 평범함이란 '좋은 것'을 아는 것. 평범함이란 '나쁜 것'도 아는것. 양쪽을 모두 알아야 '가장 한가운데'를 알 수 있다. 센스가 좋아지고 싶다면 우선 평범함을 알아야 한다. +740 수치화할 수 없는 사실과 현상을 측정하는 방법을 많이 알면 알수록 센스가 좋아진다. 스스로 인식하는 '평범함'의 기준과..
스토리보드의 예술 [밑줄] +732 피사계의 심도(depth of field) : 피사체의 초점이 선명하게 포착되는 영역을 가리킨다. 어떤 특정 화면을 촬영할 때 카메라와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는 거리상의 한계를 말한다. 심도는 렌즈의 초점 거리와 구경의 크기. 카메라와 피사체 간의 거리에 따라 좌우되는데, 이것은 기술적 개념일 뿐 아니라 미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의 화면 안에 여러 개의 피사체가 있을 경우 하나의 피사체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나머지는 초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초점의 변화는 주관적 시점의 화면 효과를 낳는다. 일반적으로 망원 렌즈는 얕고 한정된 심도를 지니며 광각 렌즈일수록 심도는 깊어진다. +733 매트 페인팅(matte paintin) : 합성 화면을 만들기 위해 생연기, 생무대, 생연기자 ..
FACTFULNESS 팩트풀니스 [밑줄] +725 "내가 왜 아동 사망률 수치에 집착할까요?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만은 아니에요. 이 수치는 사회 전체의 온도를 말해주는 거예요. 거대한 온도계처럼. 아이들은 아주 취약해요. 아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건 아주 많죠. 말레이시아에서 1,000명당 14명이 죽는다는 건 986명은 살아남는다는 뜻이에요. 아이들을 죽일 수도 있는 세균이나 기아, 폭력 같은 온갖 위험에서 부모와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든 보호하고 있죠. 14라는 수치는 말레이시아의 대다수 가정이 먹을거리가 충분하고, 하수 시설이 잘 갖춰져 더러운 물이 식수로 흘러들지 않고, 기초적 보건 의료가 잘되어 있으며, 엄마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뜻이죠. 단지 아이들의 건강 상태만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질을 보여주는 수..